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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만족의 원리만이 있다

문사수 2017.09.05 조회 수 7752 추천 수 0

우리가 삶을 사바세계라고만 규정하면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오직 더러움과 어려움으로 가득 차있을 뿐입니다. 가시덤불이나 울퉁불퉁한 자갈길이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짜증이 납니다. 어디 좋은 길은 없을까? 요행수를 찾아 비방을 쫓아 헤매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오래전, 이집트 남부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이 교실에 난입, 시험 감독관들을 때린 뒤 쫓아내고, 자녀들 대신 책상에 앉아 영어시험을 치룬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식 웃고 말 사건이지요.
자식들이 시험의 굴레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할 부모는 아무데도 없는가 봅니다. 번연히 그것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같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가치를 한정시키려는 충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적이란 객관화된 평가에 불과할 뿐, 삶의 본질 자체를 묻는 것은 아닐 겁니다.
바꿔 말해서 삶의 본질이 어떤 특질 즉 시험이라는 사건을 만나서 표현된 상태에 불과합니다. 이는 시간적으로도 과거에 발생한 것이기에, 현재나 미래까지 연장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적이라는 결과가 당사자 본연의 삶보다 앞서서 주장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향상의 지향성이나 가능성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오직 성적이라는 당장의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게 됩니다. 따라서 그 시험의 당사자가 누군인가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좀 더 확대해 가면 문제의 심각성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삶의 모든 표현들마다 실제의 우리 자신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항상 결과에 맞춰야 하니 하루하루 쫓기는 삶의 연속입니다. 전전긍긍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세계가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세계(世界)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요?
세계화니 세계인이니 하는 말들은 전혀 낯설어 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그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만약 세계가 우리보다 먼저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삶은 본래부터 따로 없었던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기에 둘 사이의 관계는 주종(主從)의 구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세계와 내가 전혀 다른 실체로서 취급된다면, 이 관계 하에서는 서로 별개의 것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세계나 나 사이에 이루어질 만남의 가능성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얘기가 논리게임인양 전개되는 듯하니,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전력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에, 심심찮게 전등이 꺼지곤 했습니다. 하루 이틀 당하는 일도 아니어서 집집마다 비상 초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정전이 되고 촛불을 밝히고 나면, 아이들은 색다른 놀이를 시작하곤 했지요. 이른바 그림자놀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캄캄한 방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손가락을 모아 촛불 앞에 갖다 댑니다. 벽에 생기는 그림자의 모양에 주목하다가 깔깔거리며 웃습니다. 개머리의 형상이 나타나면 ‘멍멍!’ 하면서 짖는 소리를 냅니다. 나비가 나타나면 ‘나비야!~’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원래는 없지만, 있음으로 창조되는 모습을 즐기던 그때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와 세계의 관계도 이 그림자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객(主客)으로서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에 관계하면서 주객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 아닌가요? 이런 관계성을 일러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따라서 세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나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세계와 세계로 투영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객관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네 삶은 물질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물질은 고정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의 삶은 이런 모습이라고 아무리 우겨봐야 그것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때와 곳을 따라 달라집니다. 세상의 모습들도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옛날 깊은 산중 절에 몇 개의 객방(客房)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난 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낮에 한 객승이 찾아와 하룻밤 신세지기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빈방이라고는 귀신이 나온다는 그 방뿐이라, 절 측에서는 사정을 얘기하며 난색을 표하였지요. 하지만 객승이 오기를 부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원, 귀신이 어디 있단 말이요. 만일 귀신이 있다면 내가 단단히 혼내겠소.” 이렇게 큰소리를 친 객승.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몽둥이를 마련하고 문고리를 점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은 자꾸 지나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 한 사람의 객승이 절을 찾아와 잠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절 측에서는 방 형편에 대해 똑같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객승도 막무가내로 그 방에서 잠을 자겠다는 것이 아닌가요? 기세당당하게 귀신 나온다는 방 앞에 다다른 객승이 문을 힘껏 잡아 당겼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자리를 잡고 낮부터 대비를 하고 있던 객승이 문고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밖에서는 문을 열려고 하고, 안에서는 문고리가 떨어질세라 옥신각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깥에서 잡아당기던 객승의 힘이 더 세었던지,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때는 바야흐로 깜깜한 밤중이라. “이놈 귀신아!” 하면서 두 사람이 뒤엉켜 밤새 싸우게 되었습니다. 몽둥이가 난무하고 주먹이 오가는 가운데, 서로가 질 수 없는 상황이라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날이 밝았습니다. 밤새 엎치락뒤치락한 귀신(鬼神)의 몰골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니 이게 누군가? 동문수학하던 도반이었던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모순된다고 보는 부정적인 인식 하에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현실만이 다가올 따름입니다.
1995년도 미즈 아메리카에 뽑힌 22살의 어느 아줌마(?)가 상을 받고 나서 한 유치원을 찾아가 유치원생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귀여운 얼굴의 아이가 “아줌마는 귀가 들리지 않는데 불편하지 않아요?” 하고 물으니, “장애(障碍)도 내 몸의 일부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아. 남들이 그렇게 볼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장애도 내 몸의 일부다!”
사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그 인터뷰 내용은 우리네 삶의 참모습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일반적으로 자기 생명의 완전성을 의심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들 있는 듯합니다. 이는 분명 완전성의 기준을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에 두는 데서 말미암을 겁니다. 그렇지만 육체 그대로가 우리의 생명이 아님은 물론, 어떤 조건을 갖춰야 완전한 육체인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하기만 합니다.

세상의 색깔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은 너무나 찬연한 빛을 발합니다. 어둠에 묻혀있을 때는 온통 검은색 일색이다가도, 태양이 뜨면 제 나름의 색깔을 뿜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 등 셀 수 없는 색깔이 세상을 수놓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색깔들은 원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색깔이 혼자만의 독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태양의 빛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만약 태양이 없다면 색깔의 빛남도 없을 겁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색깔은 태양과의 만남 속에서 그 고유의 색깔을 반영(反映)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색깔은 세상과의 만남이 없다면 깜깜한 어둠속에 묻힐 뿐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능력을 알아 줄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더 잘나서가 아닙니다. 다만 능력이라는 삶의 색깔만이 귀중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삶의 색깔은 어느 개인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빛을 발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의 것이 되어, 세상을 빛내게 됩니다. 완전하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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