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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忍耐, 공덕의 근본

문사수 2017.03.23 조회 수 9989 추천 수 0

법장비구는 24번째의 원에서 이렇게 결단(決斷)합니다. 

저의 참생명은 부처님생명이니,
제가 부처님생명으로 사는 나라의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 앞에 그 공덕(功德)의 근본(根本)을 나타내고자 하는 
공양물(供養物)을 뜻하는 바대로 얻게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공덕의 근본에 공덕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공덕의 근본은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생명을 가리킵니다. 이런 부처님말씀에 공덕의 근본을 나타내고자 하는 공양물이라고 했지, 그냥 내 멋대로의 공양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근원에 뿌리박지 않은, 그래서 그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공양물은 참된 공양물이 아니라는 시사입니다. 
내 기준으로 본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나의 생각이 갖고 있는 상대적인 한계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이라는 역설적(逆說的)인 말을 해온 것입니다.

물읍시다. 
거북이 등에 털이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털이 난 거북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굳이 가려야 하겠습니까? 또한 토각(兎角) 즉 토끼뿔을 얻었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장에 반박을 하겠지요. 뿔 달린 토끼는 토끼가 아니라, 염소든 뭐든 다른 동물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거북이는 등에 털이 없어야 거북이고, 토끼는 머리에 뿔이 없어야지 토끼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자신에게 많이 붙으면 좋은 줄 아는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딱할 뿐입니다. 
얻을 바를 바깥에서 구하려는 사람의 결말은 끝내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얻을 바가 처음부터 없는 사람에게는 허망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멍청히 앉은 채로 세상을 적당히 살라 얘기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구하려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 상대적인 잣대가 감히 끼어들 여지도 없을 만큼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흔히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이니,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자’고 하지만, 개같이 번 사람은 반드시 개같이 살게 되어있습니다. 안 된 얘기지만 개같이 살았기에, 자신의 가치를 그 이상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뭔가를 참아서 바람직한 자신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참는다니까 자기를 희생하며 맛난 음식 안 먹고 비싼 옷 입지 않는 것을 참는다고 여깁니다.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한 행복이 따를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인욕(忍辱)바라밀을 얘기할 때, ‘그래. 누가 나 욕하든 말든 참으며 행동하지 않아야지’라는 것을 능사로 삼지만, 이는 진실일 수 없습니다. 화가 나는데 왜 참아요? 안에서 화가 나고 있는 데 참으면 울화병 걸립니다. 그리고 갓난아이가 울면, 참으라고 달래는 어른이 있던데, 별로 권할 바가 못 됩니다. 애들이 성장하고서 주위의 눈치나 보는 비굴한 사람이 되기 십상입니다. 울 때는 한번 속 시원하게 울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참는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참을성이 있다고 하면 대단해보입니다.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뒤집어보면 독한 사람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자기식의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목적을 성취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남들 앞에서 ‘저, 괜찮아요’라고 하지만,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안으로는 독기(毒氣)를 품고 있으면서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참는 것은 거짓된 치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과거의 산물(産物)인 생각에 따르는 특정한 결과나 상태를 바라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참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을 먼저 고정시키려는 시도를 아예 갖지 않으려고 함입니다. 이번에 내게 1억이 들어오면 거기에 상당하는 행복이 있을 거라는 식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참으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한 상대적인 기대를 근거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러한가? 그것이 상대적인 자신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니까 윤회를 면치 못하고 항상 지옥(地獄)을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근본뿌리로부터 살고 있습니다. 삶의 근원이 돈이요, 건강이요, 몸뚱이요, 또는 옆에 있는 나를 미워하고 이뻐하는 사람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염불(念佛)한다는 것은 별스러운 게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공덕의 근본이 어디인가를 잊지 않는 것 아닙니까? 
“나무아미타불!”하며 염불하는 것은, 지금 법장비구의 24번째 원과 같이, 공덕의 근본으로부터 살고 있음을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는다는 생명의 선언입니다. 그랬을 때 염불삼매(念佛三昧) 즉 절대적인 성취가 따라올 뿐입니다. 상대적인 성취는 앞세울 게 못 됩니다. 바깥의 상대적인 성취가 다가오더라도, 그것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만, 그것은 효용가치가 있을 따름입니다. 쓸 줄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 이제 염불행자(念佛行者)의 선택은 유일(唯一)합니다. 이것저것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다만 오직 공양물을 얻기에 앞서서 공덕(功德)의 근본(根本)에서 출발하며 살 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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