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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의 관계

문사수 2017.01.24 조회 수 10993 추천 수 0

가뭄이 극심할 때는, 비가 쏟아지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하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비가 쏟아지면서 해갈(解渴)의 수준을 넘어 홍수라도 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하늘도 무심하지!”
하며 원망 섞인 푸념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헌데 우리는 왜 이리도 상대적인 결과에 따라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을까요? 다시 얘기하자면 물이 부족하면 물이 없다고 난리고, 물이 많으면 물이 많다고 오두방정을 떠는 게 영 기분이 개운치 않습니다. 그럼 삶의 조건을 쥐락펴락한다고 여겨지는 하늘께 무릎을 꿇고 매달리면 만사가 술술 풀릴까요?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상하다고요? 아뇨,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하늘의 행성(行星)에 태어났기에, 하늘나라의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또 어느 하늘을 향해서 따로 빌겠느냐 이겁니다. 자꾸 하늘을 쳐다보면서 거기에 주재(主宰)하는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처지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습니다. 지구인(地球人)이라는 말 자체가 하늘에 떠다니고 있는 우주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면목(面目)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을 때, 결국은 상대적(相對的)인 지식과 경험의 지배를 받으리란 것은 불 본 듯이 훤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흔히 세계관의 전환으로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는 말의 유래(由來)를 되새겨 봅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코페르니쿠스에게 동조한 사람들이 주장한 것은 지동설(地動說)입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신학계의 입장은 천동설(天動說)을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확고부동한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지구는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 완전하다.”
거기까지는 그럴듯합니다. 따라서 온 천지는, 태양이라든가 달이라든가 별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만드신 완전한 피조물이 지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지동설이 옳으냐 천동설이 옳으냐하는 유럽 중세시대의 논쟁을 다시 거론하자는 게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심리적(心理的)으로 지동설보다 사실은 천동설을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있고, 내 기준점에 따라서 세상이 돌길 바랍니다. 이러한 상대적 입장, 즉 나라고 하는 고정된 존재에 따라서 너라고 하는 또 다른 고정된 존재가 규정되기에 말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착각으로부터 다음의 우화(寓話)와 같은 제멋대로의 행복관(幸福觀)이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영리한 개가 동네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 떼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개가 웬 고양이 떼인가 해서 가보니, 고양이들이 아주 진지한 모임을 열고 있었습니다. 고양이들의 생사(生死)가 걸린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개가 옆에 다가갔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질 않았습니다.
그때 많은 고양이들 중에서 근엄하고 무척이나 경건해보이고 덩치도 큰 한 고양이가 연단에 올라갔습니다. 모인 고양이들을 휘둘러보다가 마침내 일장 연설을 하는데, 자못 비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고양이 제군 여러분 우리 다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고양이들이 갑자기 숙연해집니다.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옛날부터 전해오기를 우리들이 참으로 의심 없이 믿고 기도하면 하늘에서 쥐가 비같이 쏟아진다고 하니,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풍요롭게 살지 않겠습니까?”
온통 진지함으로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하고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던 개가 가만히 생각하니, 웃기지도 않는 겁니다. 아주 영리한 개였기에 혼잣말을 합니다.
“역시 고양이는 돌대가리야. 너희들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봐라. 내가 본 책이나 우리 조상님들이 헛말은 안하셨다. 참으로 진실하게 기도하면 하늘에서 뼈다귀가 쏟아진다고 했다. 그런데 저런 기도가 이뤄질리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자기의 구(求)하는 바 기준치가 있는데, 그것을 충족시킬 만큼 조건이 쏟아지면 난 만족할거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이걸 가지고 행복이라고 우기다가, 이게 아니다싶으면 불행하다는 식의 시소게임을 수시로 벌입니다. 이러한 삶을 언제까지나 그래도 봐줄만 하다고 방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체계를 점검하지 않고는,
“내가 왜 사는가?
사는 사람은 누군가?
그리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를 묻지 않고서는, 실로 남을 비판할 자격도, 세상을 원망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냥 시간은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다 북망산(北邙山)이 어느 날 앞에 떡하니 나타나서는 갈 길을 재촉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이런 상대적인 추구의 마지막 귀결이 만약에 현상적인 잣대의 죽음으로만 귀결된다면,
“참으로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문제에 따른 답을 잃고 맙니다.
진정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눈감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제대로 알아야 해답을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문제를 호도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이제 그만!
익숙하던 기준점에 안 맞는 현실이 벌어진다는 것은, 당황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수사(修辭)와는 거리가 멀어도 십 만 팔 천리 다른 길입니다. 넋 놓고 죽으란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수정할 때가 도래하였다는 신호와 다르지 않습니다.

눈[眼]은 세상 만물을 다 볼 수 있지만, 단 하나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모순(矛盾)을 갖고 있는데도, 눈으로 세상을 다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내가 봤다’고 하지만, 그 근거인 눈이 갖는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신은 그것을 무척이나 신뢰할지라도, 내용적으로 온갖 편견의 연속과 굴절된 사고방식의 표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눈을 볼 방법이 전혀 없는 게 아닙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그때 눈은 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거울이라는 현상의 자기 모습을 봤을 때, 진정한 자기를 볼 수 있음을 뜻합니다. 내 앞에 있는 거울로서의 세상, 그 세상에 비치는 나와 분별 또는 대립해 있는 나는 본래부터 없기에 그렇습니다.

먼저 자기부터 봅시다.
세상은 나로부터 보이는 세상이지 그 세상에서 내가 거꾸로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먼저 자기를 보고, 그러고 나서 현상계를 살아가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오직 나의 반영(反映)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와 비슷한 정도가 아닙니다. 온통 나와 다르지 않은 세상이 벌어집니다.

마침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간관계의 갖가지 인연(因緣)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뿐입니다. 상대적인 처지를 바탕으로 해서, 싫은 것은 외면하고 좋은 것은 쟁취(爭取)하려는 가치판단을 일으킬 새마저 없습니다.지금, 여기서 있는 그대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내 눈앞에 보인다면, 그것은 좋고 싫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모두가 나의 삶으로부터 말미암아 나의 삶으로 복귀하고 있을 따름이니, 바로 이럴 때가 ‘나무(南無)!’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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