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우리가 문(聞) 사(思) 수(修) 해야 하는 이유는...

문사수 2017.01.12 조회 수 10968 추천 수 0

불교는 ‘내가 있다’고 하는 상대유한을 떠나서 부처님생명인 절대무한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나무’는 육신이 나라고 하던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을 떠나는 것이 불교에서는 대사일번(大死一番), 크게 한번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은 아닙니다. 크게 죽는다는 것은 상대유한을 떠나는 것이고, 이에 대활자현(大活自現), 부처님생명인 절대무한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무한은 몸이 내가 아님을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 남보다 조금 잘났다고 우쭐하거나 못났다고 위축되는 생각을 내버린 자리가 곧 “상이 상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하는 부처님 말씀의 내용입니다. 

불교의 궁극은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있습니다. 
괴로움을 여읜다고 할 때의 그 괴로움은 생로병사 혹은 구하는 마음 등인데 그것은 곧 상대유한을 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남과 대립하고 생존경쟁을 하면서 자기에 대한 생각이 더욱 굳어지므로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질병에 대한 걱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해치면 어쩌나 하는 근심 속에 지냅니다. 괴로움을 여읜다는 것은 이러한 상대유한을 떠나는 것을 이릅니다. 

불교에서는 천국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대립이 끊어졌다면 지상을 떠나 천국에 간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계, 즉 울타리가 없는 것이 무한입니다. 천국과 지상에 울타리가 없는 것인데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면 상대유한의 연장이며 미신(迷信)이 됩니다. 
괴로움을 여읜다는 말은 곧 대립관념을 없앤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것은 절대무한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 밖에 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천지가 1인칭의 세계입니다. 
절대무한이라는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곳으로 공간적인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특정 조건이 구비되어야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출가했거나, 법회를 나오기 때문에, 혹은 불교를 알기 때문에 죽고 나면 혹은 미래에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구원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부처[已成佛]’임을 알려주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중생 스스로는 상대유한을 고집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본래부터 절대무한임을 일러주십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조금도 차별이 없는 절대무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잘났으니 절하고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을 언제나 공경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부처님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는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두 분이 서로 농담의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먼저 “당신의 얼굴은 배고픈 개가 뒷간 바라보는 얼굴이요.”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학대사는 “대왕마마는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하였습니다. 
왕은 서로 농담하기로 했는데 왜 어기는가 묻습니다. 
이에 무학대사는 “똥개 눈에는 똥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 부처님 말고는 없습니다. 
자식이 부처님이고 형제가 부처님이고 이웃이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지혜의 눈이 열리는 것이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입니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는 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일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생기도록 100일 동안 하루에 스님 한분씩 모셔다가 법문을 듣고 잘 대접해드렸습니다. 문수보살을 부르면서 정진하여 회향일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스님 한분을 모셔오라고 하인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하인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장으로 나가봤지만 문둥병을 앓고 있는 스님 한분만 보일 뿐 다른 스님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행색에 상관없이 스님이면 모셔오라고 합니다. 얼굴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몸에서는 심한 냄새가 나고 한발 한발 움직일 때마다 고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님께 대접을 융숭히 잘 해드렸습니다. 걸어 나가는 길에도 떨어지는 고름에 조금도 더럽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공양을 받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들어오는 길에 보니 바닥에 떨어졌던 고름들이 모두 연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겉모양[상(相)]에 속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름을 박문수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장율사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자장율사께서는 문수보살 친견(親見)하기 위해서 100일 기도를 시작합니다. 회향일이 되었으나 아직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웬 거지같은 노인이 등 뒤 망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들쳐 메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자장 있느냐?” 하며 자장스님을 부릅니다. 
시자가 법당에 들어가서 밖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자장스님은 그 거지에게 뭔가 줘서 보내라고 합니다. 이에 그 노인은 
“자장같이 아상(我相)이 높은 자가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하며 문수보살로 변하였고 죽은 개 또한 사자로 변해서 그 사자를 타고 날아가 버리십니다. 
이렇게 자장 율사는 부처님께서 안 계셔서가 아니라 아상 때문에 뵙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모시려면 모든 이를 부처님으로 보는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법회에 다니는 이유는 법문을 통해 내가 본래 부처임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문사수(聞思修)를 하는 것입니다. 
법문 들으니[聞], 모두 부처님 생명인데[思], 내가 지금 사는 방식은 남을 원수나 사기꾼으로 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수정하는 것[修]입니다. 
내 마음에 헤아려지고 만져지는 것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 내려놓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  나무아미타불_()_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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