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한설을 거치지 않고 매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랴?” 하는 유명한 글귀가 있습니다. 북풍한설의 차가운 기운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매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력이 향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법우님은 매화 자체와 매화를 그린 그림의 차이를 아십니다.
아무리 멋진 그림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매화의 향기까지 맡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년에도 그 그림은 그 그림입니다. 그림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화는 어떻습니까?
순간순간마다 모습을 바꿔갑니다.
피었다가 때가 되면 시들고, 또 때가 되면 썩어갑니다. 활짝 핀 것이 꽃이라면, 시드는 것도 꽃이요, 썩어가는 모습도 꽃입니다. 이것이 모든 생명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새싹이 돋는다면 그것이 언젠가, 썩어 문드러질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피어나는 매화 자체에 감동하기 보다는 매화 그림에 감동합니다.
왜? 그만큼 고정된 것에 대한 유혹이 강한 것입니다.
모습은 모습일 뿐인데, 우리가 거기에 좋은 것, 나쁜 것을 구별하면서 스스로가 구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매화는 피어날 때 그 모습이 바뀌게 되는 것이 매화의 운명인 것입니다. 매화의 피고 지는 모습은, 그 생명이 그때마다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이렇게 온갖 모습을 바꿔가며 나타내는 것이 생명의 위대함입니다.
새싹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허물어져 가는 모습까지도 생명의 모습일 뿐입니다. 어떤 모습으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생명 본래의 모습입니다.
생명은 이렇게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아름다움은 모습이 바뀌어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납니다. 고정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과정의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도 태어남의 순간에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이후 매일매일 숨 쉬고 매일매일 태어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매일매일 활동하는 생명력으로 매일매일 바뀌면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딸이었던 사람이, 누군가의 부인도 되고, 누군가의 어머니도 되고, 또 어느 날은 할머니도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습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원인,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의 위대함이란 이렇게 어떤 모습이나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모든 현상은 현상일 뿐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항상 하지 않다[諸行無常]’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제행무상이라고 하니까, ‘아 그래, 인생은 허무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절대 허무하지 않습니다.
한겨울의 얼어붙은 땅속에서도 매화꽃 향기를 피워내는 생명력은 꿈틀거리며 활동합니다. 그러다가 시기를 만나면 꽃을 피워내고 향기를 뿜어냅니다.
우리 스스로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게 삶의 진정한 원점입니다. 나이 든 사람도, 설사 실패한 사람도, 좌절하고 있는 사람도, 실체가 아닙니다. 성공이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적 평가일 뿐입니다.
제행무상이란 ‘바뀌는 모습에 마음을 뺏기지 말라’고 하는 간곡한 가르침입니다.
모습은 모습일 뿐입니다.
이 바뀌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것이 제행무상의 기본적 가르침입니다. 모습은 바뀔 수밖에 없고, 세상이 온통 바뀌는 모습 천지이며, 나 또한 바뀌는 모습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런 멋진 구절이 나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또한 반야심경에서는 무소유(無所有)를 말씀하십니다.
무소유라고 하니까 재산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있는 바가 없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 ‘참으로 있지 않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현상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에게 대입시키면, ‘나’라는 고정된 모습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어떤 모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며, 어떤 모습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 한정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직 지금의 사는 모습이 생명의 본래 그 자리란 겁니다.
생명은 지금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습니다. 어제를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생명은 오직 활동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순간에도 인식이나 평가를 뛰어넘어 엄청난 생명이 공급되고 있으며, 그 공급된 생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귀한 생명의 자리, 바로 그 자리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활동하고 있는 주인공, 그 사람을 일러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면 시체라고 합니다. 안정된 것만 바라고 고정된 표현만 하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제행무상을 스스로에게 대입시키면,
자기를 한정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어떤 모습으로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즉 변화해 가는 온갖 예측 불가능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어떤 모습도 나타낼 수 있는 그 자리에 돌아가라는 것이 제행무상의 가르침입니다.
내 생명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았을 때, 내 생명이 어떤 모습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머물지 않습니다. 즉 무상함 속에서 거꾸로 생명의 영원성과 활동성을 회복하게 되는 진리의 법칙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머뭇거리지 말고 이렇게 멋진 생명의 주인공으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 봅시다. 여러분의 다양한 모습이 세상을 한껏 가꾸고, 가꿔진 모습이 세상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는 생각에 저 또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제행무상, 이 진리의 법칙에 따라 살 때, 우리 삶은 보다 더 행복하고 기쁨이 더해갑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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