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차갑습니다.
교통사고나 부도 등 우리의 당연한 기대를 저버리는 사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삶이 고정되어 있으리라는 사고방식에 무던히도 길들여져 왔습니다.
오늘 학교에 가는 학생은 내일도 등교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어제 얼굴을 마주한 회사동료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천연덕스럽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만들어졌나 봅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선뜻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막상 피부에 와 닿을 만큼 구체적이어도 마음의 밑변에서는 여전히 도리질 칩니다.
“아니야. 이것은 나의 현실이 아닐거야”
하면서, 끝내 부정하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변화하는 것이 삶의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잘 나가가던 사업이 돌연 나빠지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제계 일각에서 ‘변해야 산다’는 절규에 가까운 논의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무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변하고자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삶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한다고 하는 것도 자기를 중심으로 한 모양새가 바뀌는 정도를 넘지 못합니다.
어릴 때에는 몹시 속상하던 사건이 어른이 되어서는 오히려 흐뭇한 추억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성장에 따라서 즉 변화의 와중에서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변화 자체에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변화하기 마련이지요. 그것은 바람직하냐 아니냐의 평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무상의 법칙은 가치판단(價値判斷)의 기준마저 변화시키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딱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확실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당연히 과거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진정한 나의 삶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모순. 우리는 이러한 모순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참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한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극히 당연한 사실에 눈감을 때 뒤틀린 상태가 벌어집니다. 변화한다는 모순을 도저히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벽으로 치부하기에 삶은 움츠러들고 맙니다.
이때 마치 흐르던 물이 고이면 썩듯이, 조건이 갖춰졌기에 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포라는 이름의 독버섯입니다.
그렇습니다.
공포로부터 나오는 어떤 대책도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안이한 처방입니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으면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알아야 합니다.
‘알 수 없는 공포’라는 말도 안 되는 족쇄에 내 소중한 삶을 맡긴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가요? 변화한다는 것을 무조건 터부시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 변화의 주체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임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암담해 보일지라도 이 또한 무상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기에 말입니다.
무상은 삶의 참모습입니다.
어떤 공포도 침입할 틈이 없는 우리의 본래 자리입니다. 따라서 어제가 그러하였듯이 오늘도 살아 있는 우리의 생명은 어느 한 순간도 잠든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겨울 들판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생명의 위대함을 묵묵히 증언합니다.
파란 잎새가 빽빽이 무성하고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을 때만이 아니라, 낙엽이 흩날리고 이슬이 맺히는 쓸쓸함 속에서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말입니다. 봄의 들녘을 장식하는 파랗고 빨간 꽃들의 제전에 못지않은 장관이 겨울의 땅속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산하대지가 온통 얼어붙어 있을 때라도 가느다란 뿌리에 머무는 강인한 생명력은 거침없이 뻗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생사(生死)로 나누어 놓고 좋고 나쁨을 생각하거나, 영고성쇠(榮古盛衰)로 구별하며 웃고 우는 것은, 자신의 참생명을 외면하는 인간의 제한된 시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사시사철의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지구 자체의 몫은 아닙니다. 주변을 휘도는 경관이 바뀔 뿐이지요.
그리고 잔뜩 흐린 날씨면 어떻고, 활짝 갠 하늘이면 또 어떤가요?
태양 자체의 빛남에는 눈곱만치의 손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끊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떤 나쁜 조건도 어찌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할 위대한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죽음이 없기에 새삼스레 태어남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그대로 완전하기에 부증불감(不增不減)이기도 한 우리의 참생명입니다.
천지간에 가득 차서 아예 죽음이 없는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그 어떤 힘도 당신의 능력을 위축시키거나, 당신의 내일에 어둠을 드리울 여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끝없이 소생(蘇生)하는 활기찬 생명활동 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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