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괴로움을 겪는 게 싫다. 하늘나라에서 천인(天人)의 삶을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 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거기서 살 수 있다는 검증되지 않는 약속을 담보로 해서, 온갖 정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띕니다. 이리 채이고 저리 밀리는 날들을 무덤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힘겨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위안이 될 만한 꿈을 키워 왔습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nowhere)'를 뜻하듯, 천인(天人)과 같이 삶의 현장을 떠난 꿈의 성취는 실제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와 이 ‘하늘’의 첫 만남은 무척이나 극적입니다.
성도(成道)하시고 난 후 부처님은 새삼 고뇌에 잠기셨습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으며, 그 바탕이 청정하여 취할 수도 놓을 수도 없고, 공적(空寂)하여 얻을 것이 없는 길이 열반(涅槃)의 바다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알아들을 자가 없을 것이며, 도리어 비방할 것이다. 비방하면 이익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로 하여금 구업(口業)만 짓게 하리니 어찌하면 좋은가?”
이때 범천(梵天)이 나타나 은근히 청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지난 오랜 세상에 중생들을 위하여 생사(生死)의 바다에 출몰하시어 한량없는 고행(苦行)을 닦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최상의 도(道)를 이루시고, 어찌하여 잠자코 가르침을 말씀하지 않으시렵니까?”
범천권청(梵天勸請)으로 널리 알려진 이 대목에서 보다시피, ‘하늘’의 입장은 너무나 절실합니다. 마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다면, 자신이 언제까지나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투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정체가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든 욕망이 말 그대로 완벽하게 충족된다면, 우리의 삶에는 오로지 기쁨만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의식주(衣食住)와 같은 기본적인 조건은 물론이고, 갖가지 욕망이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됨을 일러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즉 하늘은 우리의 꿈이 극대화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왜 그럴까요?
비록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생명감각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넉넉함이나 사회적인 인정을 달성한다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이른바 충족된다는 것은, 언젠가 다시 부족한 현실로 전락(轉落)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지옥·아귀·축생 등과 같은 삼악도(三惡道)로 언제라도 윤회할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운명입니다.
누릴 만큼 누렸고, 오를 만큼 오른 사회적·정치적인 위상도 언젠가 때가 되면 내려오는 법입니다. 갖은 즐거움을 맛보던 사람이 추(醜)한 몰골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남을 도울 줄 모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파산하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겨우 이해하기 합니다.
아쉬워도 이제는 어쩌지 못합니다. 하늘을 꿈꾸다가 천인(天人)이 된 사람이라면 또 다른 윤회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기에 말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택해야 할 방식이 한두 가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특정 분야에 몰두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인생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여기면 엄청난 착각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건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는 양면성(兩面性)이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함께 하는 것이지요. 즉 삶의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지향성은 각자마다 다릅니다.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은 좋은 면을 드러내는 사람이고, 불행하게 보이는 사람은 나쁜 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보편성을 잃은 어떤 삶의 방식도 대립(對立)의 구도를 면할 수가 없게 됩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과 같은 대경(大經)을 보면, 경전의 막이 오르기에 앞서서 어이없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부처님을 모시던 제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퇴장하는 것이지요. 누구보다 그 자리를 지켜야 할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스스로 외면한 것이지요.
얼핏 어이없는 상황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훗날 이들을 가리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라고 이름한 것을 보면 십분 이해됩니다.
성문이란, 말 그대로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지식욕이 채워지면 기뻐하는 사람이지요. 책을 읽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을 납득하면 기쁨에 가득 찹니다. 그것이 성문의 유일한 보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오직 눈앞에 보이는 사실에만 의미를 둡니다. 지식을 구하는 노력을 함에 있어서 참으로 열심입니다. 때문에 그 노력만큼이나 자신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열망이 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 또는 경험을 마지막 판단의 근거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문은 지식을 소유하는가 하면, 지식에게 스스로 소유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연각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생명감각을 만끽합니다.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하고 다른 체험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다양성을 아예 외면하기에 나 혼자만의 삶을 즐깁니다.
그래서 어이없는 일을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지요.
흔히들 욕심을 버리라고 하니까, 욕심을 나쁜 것으로 대하는 경우가 아마 대다수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목석(木石)인양 감정없이 사는 모습이 찬양되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특정 인물의 단편적인 모습이 과대 포장돼서 모든 사람들의 사표로 권장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파격적인 행동이나 말을 전매특허와 같이 남발합니다. 욕심이 없다는 미명하에 온갖 비행을 저질러도, 그것은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껄껄 웃어넘기고 맙니다. 혹시라도 그의 잘못됨을 꾸짖는 사람을 만나면, 더 큰소리로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십팔 번 인양 읊어대는 것이지요. 아무튼 문제는 자기[我]가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의 노력만으로 자기의 생명력을 강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입니다.
성문이든 연각이든 이런 성향의 사람은 스스로에게 진실이기를 바라는 사물만 선택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참된 자기에 대한 불감증(不感症)에 걸린 사람들은 생명의 흐름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체험이든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과의 교류를 당연히 거부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나의 참생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런 착각들에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삶을 지향하든, 성문·연각이 되어 ‘에헴!’하는 삶을 꾸미고 살던 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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