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어느 날, 해변을 거닐던 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내린 비는 어디로 흘러갈까?”
땅에 내린 비는 내를 이루고 강이 되어 흐르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바다에 내린 비도 어디론가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비가 내린 바다는 아무 곳으로도 흐르지 않습니다. 비가 올 때면 질퍽거리는 길을 걸어야 하고 젖은 옷 말리기에 정신이 없는데, 바다에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새삼 어디로 흘러갈 것도 없이 바다에 내린 비는 그냥 바닷물이 될 뿐입니다.
바다는 자신에게 흘러오는 모든 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거부의 몸짓을 할 새가 없습니다. 그저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물들을 다 품습니다. 품어서 하나 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냥 있을 따름입니다.
하심(下心)의 화신이라고나 할까요?
때문에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지역을 따지지 않습니다. 어떤 출신내력이나 과거에 묻어난 조건도 상관치 않습니다. 흘러드는 모든 것은 다 받아들입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치부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그 자체의 역량을 헤아려보면 크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쏟아내는 쪽은 흘려 내리기 바쁘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별 것을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넓기만 합니다. 그리고 유입되는 양에 한정이 없기에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언제나 깊습니다.
이렇게 참으로 크고 넓으며 깊은 바다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본질적으로는 그러하지만 가끔씩은 착각을 합니다. 내 마음에 들 때는 깨끗하다고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더럽다는 구분을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더럽고 깨끗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나라는 인생이 구성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인생이라는 바다 속에서 내가 과연 주인공인가, 아니면 조건에 휘둘리는 사람인가를 생각해보면 해답은 확실해집니다. 받아들이는 주체가 바로 나이기에,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간에 모두가 나로 귀결되고 맙니다. 따라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야지 행복할 것이라는 시도는 항상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이지만 때와 사람, 그리고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다의 빛깔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깊은 바다는 파란 색깔을 띱니다. 그런가하면 얕은 바다에 오면 녹색이 됩니다. 똑같은 바다인데도 보는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서 빛깔이 달라집니다. 같은 바다인데 말입니다.
세상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판단도 그렇지 않은가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즉 깊이 있게 보느냐 얕게 보느냐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달라집니다. 이렇게 우리들에게 보이는 수많은 물빛이 다르듯이, 세상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우린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각자가 다른 세상을 택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지향에 있어서 그 근본성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의 맛을 알기 위해서 서해바다를 다 먹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대해일미(大海一味)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큰 바다라도 여러 가지의 맛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평양 바닷물이나 서해 바닷물이나 우리가 이름을 따로 붙여놓았을 뿐이지, 바다 자체는 한 맛입니다.
우리가 나의 참생명을 부처님생명임을 선언한다고 하는 것, 이는 우리네 삶 전체에 있어서 모두의 공통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무(南無)할 때, 즉 인생바다의 한 방울을 찍을 때 세상이 모르는 나만의 맛은 없어집니다. 세상살이의 맛이 나를 점령합니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고유한 맛과 세상의 맛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이럴 때 우리의 인생은 세상 모두가 나를 향해서 나무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실로 우리가 평소에 이런 좋은 결과를 맞고자 하면서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비를 받아들여서 온갖 것을 하나로 되게 하는 그런 바다의 마음은 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랫가락으로 ‘바다가 육지라면~’ 하며 목놓아 불러보아도, 바다는 그냥 바다입니다. 본래의 면목을 하나도 잃지 않으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바다가 한 모양인 것 같지만, 어떨 때는 성난 파도가 되고 어떨 때는 잔잔한 호수 같아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다는 그저 그러합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그냥 그러한 상태로서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볼 때 바닷물이 줄은 것 같고 불은 것 같지만, 이는 상대세계를 쫓는 내 입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참생명은 더할 것도 없고 모자랄 것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부처생명자리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계산에 조금만 미치지 않아도 안절부절 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존경하던 사람을 우습게 알기 일쑤고, 온 몸을 바쳐 정열을 태우던 일은 하루아침에 후회 막급한 사건이 되어 원망하기 바쁩니다.
그렇지만 이는 상대적인 관점에 따라서 울고 웃는 중생계의 해프닝이지, 나의 참생명 자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참생명은 줄 것도 늘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다만 오직 나무아미타불 하지 않습니까?
“나무(南無)!
아! 부증불감 그 자체인 참생명에 돌아가니, 그 자리는 무한생명 무한광명인 아미타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아니 믿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저를 언제 어느 곳에서는 받아주고 계신 부처님께 모든 삶을 맡기고 살아가겠나이다.”
바다에 나무(南無)했을 때 바다는 무한한 법문을 이렇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인생의 바다에 던질 때, 그 무한의 세계가 바로 나의 삶이 됩니다.
이제 바다가 된 우리는 바다의 모든 속성을 드러내고 살면 그만입니다. 어느 때는 수십만 톤의 유조선을 두 쪽 내는 삼각파도와 같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다른 때는 이태백을 유혹할 만큼 아름다운 달을 띄울 고요와 정적(靜寂)을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바다의 사나이, 바다의 여장부가 되어 사는 우리네 삶의 풍족을 감히 측정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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