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답게 불교에 입문한 사람
보현행원품에
그 모든 중생들이 병고 없이 항상 안락하기를 바라며
악한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도 됨이 없고
좋은 업[善業]을 닦고자 하면 모두 속히 성취하며 …
라고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내 몸을 돌보기도 힘든데 어떻게 남들이 다 편안하기를 바랍니까?’라고 합니다. 하지만 본래 남이 없습니다. 남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실은 남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이 평안해지고 남들이 건강해질 때, 그때 나는 저절로 건강해집니다. 그러므로 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불도(佛道)를 닦음으로써, 그 공덕으로 이 세상에 병들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 안락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이 행복해집니다. 착한 일을 속히 성취하기 바라는 마음은, 그것이 곧 온 천지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도(惡道)의 문은 닫아 버립니다. 만약 지옥(地獄)에 갈 사람이 있으면 지옥의 문은 닫아버리며, 아귀(餓鬼)·축생(畜生)의 길도 마찬가지로 닫아버립니다. 지옥·아귀·축생으로 가는 문을 닫아버리는 분을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고 합니다. 지장보살만이 아니라 우리가 부지런히 정진하는 공덕 때문에 악도의 문은 닫아져버립니다. 남이 잘못 했을 때 헐뜯고 흉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괴로움을 대신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는,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도 ‘내 것’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거나, ‘착한 일을 한 그 복이 나에게 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아직 참다운 불교에 입문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참답게 불교에 입문한 사람은 자기가 지은 공덕으로 세상 사람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재산을 모았다면, 자기가 근면하고 능력이 있어서 재산을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장사 잘돼요?”
하고 물어보면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요.”
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환경이 허락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경기가 좋았을 때 돈 벌었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자기가 잘나고 능력이 훌륭하고 부지런해서 돈을 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객관세계가 그 사람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돈을 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산이라는 것을 자기 개인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온 국민의 것이고 전 세계 모든 인류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인류와 온 국민들의 이익을 위하여 써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내 것이라고 움켜쥘 때 재산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지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하나 영광스럽고 행복스럽고 호강하려고 얻는 지위가 아닙니다. 전부다 남들에게 봉사하는 지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도 모든 중생들에게 심부름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심부름 잘한다는 것이 바로 이 회향(廻向)과 같은 뜻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동포형제들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그 은혜를 갚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회향 법문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님의 은혜·스승님의 은혜·국가의 은혜, 그리고 일체 모든 중생의 은혜를 ‘네 가지 귀한 은혜[四重恩]’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은혜를 갚아나가는 것으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절에 다니며 불공(佛供)드리고 정진(精進)한다는 것도 나에게 은혜를 주신 모든 분에게 은혜를 갚는 한 방편이지, 그 복이 나에게만 오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종교행위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자체가 이렇게 회향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덕을 짓는다고 하고, 그 중에 제일 큰 공덕이 보시이지만, 그런 보시조차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공덕을 지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준 그 모든 분들에게 공덕을 회향해야 하는데, 받을 중생이 없으면 보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보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인격자이십니다. 게다가 남편도 흠이라고는 하나 없는 사람이고, 아이를 낳았는데 도저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완벽한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주부에게 시집을 잘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집에서 보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금생을 허비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시집을 못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시어머니는 주책망나니이고, 남편은 노름이나 하고 다니니 집은 가난할 수밖에요. 게다가 자식이라고 난 것이 못난이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때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아주 나쁜 곳으로 시집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몸을 꿈쩍만 해도 모두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가치판단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몸이 편하고 아무 일 없이 살면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운명을 창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남에게 보시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시집 잘 간 사람은 보시를 할 수 없고 어렵게 시집간 사람은 보시를 잘 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한다는 것은 부처님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慈悲)가 부처님생명입니다. 자비란 남들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중생이 없으면 보살이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지 못 하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나를 괴롭히고, 나에게서 뜯어가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굉장히 해롭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중생이 없어야 내가 불교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사람이 없으면 보시를 할 수 없어서 부처님의 참생명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를 보살펴주고, 나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를 들볶고, 나를 못 살게 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으면 내가 자비를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에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계산하고 나의 이익을 유보하면서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修行)이라고 할 때, 결국은 내가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참선(參禪)도 있고, 염불(念佛)도 있고, 독경(讀經)도 있고, 예경(禮敬)도 있지만, 종류에 관계없이 내용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나라는 생각을 뽑아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라는 것을 부정해 나가는 공부입니다. 이것이 불교 공부이며, 수행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보현행원품에
그 모든 중생들이 병고 없이 항상 안락하기를 바라며
악한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도 됨이 없고
좋은 업[善業]을 닦고자 하면 모두 속히 성취하며 …
라고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내 몸을 돌보기도 힘든데 어떻게 남들이 다 편안하기를 바랍니까?’라고 합니다. 하지만 본래 남이 없습니다. 남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실은 남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이 평안해지고 남들이 건강해질 때, 그때 나는 저절로 건강해집니다. 그러므로 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불도(佛道)를 닦음으로써, 그 공덕으로 이 세상에 병들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 안락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이 행복해집니다. 착한 일을 속히 성취하기 바라는 마음은, 그것이 곧 온 천지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도(惡道)의 문은 닫아 버립니다. 만약 지옥(地獄)에 갈 사람이 있으면 지옥의 문은 닫아버리며, 아귀(餓鬼)·축생(畜生)의 길도 마찬가지로 닫아버립니다. 지옥·아귀·축생으로 가는 문을 닫아버리는 분을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고 합니다. 지장보살만이 아니라 우리가 부지런히 정진하는 공덕 때문에 악도의 문은 닫아져버립니다. 남이 잘못 했을 때 헐뜯고 흉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괴로움을 대신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는,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도 ‘내 것’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거나, ‘착한 일을 한 그 복이 나에게 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아직 참다운 불교에 입문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참답게 불교에 입문한 사람은 자기가 지은 공덕으로 세상 사람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재산을 모았다면, 자기가 근면하고 능력이 있어서 재산을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장사 잘돼요?”
하고 물어보면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요.”
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환경이 허락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경기가 좋았을 때 돈 벌었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자기가 잘나고 능력이 훌륭하고 부지런해서 돈을 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객관세계가 그 사람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돈을 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산이라는 것을 자기 개인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온 국민의 것이고 전 세계 모든 인류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인류와 온 국민들의 이익을 위하여 써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내 것이라고 움켜쥘 때 재산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지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하나 영광스럽고 행복스럽고 호강하려고 얻는 지위가 아닙니다. 전부다 남들에게 봉사하는 지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도 모든 중생들에게 심부름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심부름 잘한다는 것이 바로 이 회향(廻向)과 같은 뜻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동포형제들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그 은혜를 갚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회향 법문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님의 은혜·스승님의 은혜·국가의 은혜, 그리고 일체 모든 중생의 은혜를 ‘네 가지 귀한 은혜[四重恩]’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은혜를 갚아나가는 것으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절에 다니며 불공(佛供)드리고 정진(精進)한다는 것도 나에게 은혜를 주신 모든 분에게 은혜를 갚는 한 방편이지, 그 복이 나에게만 오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종교행위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자체가 이렇게 회향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덕을 짓는다고 하고, 그 중에 제일 큰 공덕이 보시이지만, 그런 보시조차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공덕을 지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준 그 모든 분들에게 공덕을 회향해야 하는데, 받을 중생이 없으면 보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보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인격자이십니다. 게다가 남편도 흠이라고는 하나 없는 사람이고, 아이를 낳았는데 도저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완벽한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주부에게 시집을 잘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집에서 보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금생을 허비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시집을 못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시어머니는 주책망나니이고, 남편은 노름이나 하고 다니니 집은 가난할 수밖에요. 게다가 자식이라고 난 것이 못난이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때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아주 나쁜 곳으로 시집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몸을 꿈쩍만 해도 모두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가치판단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몸이 편하고 아무 일 없이 살면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운명을 창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남에게 보시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시집 잘 간 사람은 보시를 할 수 없고 어렵게 시집간 사람은 보시를 잘 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한다는 것은 부처님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慈悲)가 부처님생명입니다. 자비란 남들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중생이 없으면 보살이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지 못 하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나를 괴롭히고, 나에게서 뜯어가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굉장히 해롭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중생이 없어야 내가 불교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사람이 없으면 보시를 할 수 없어서 부처님의 참생명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를 보살펴주고, 나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를 들볶고, 나를 못 살게 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으면 내가 자비를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에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계산하고 나의 이익을 유보하면서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修行)이라고 할 때, 결국은 내가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참선(參禪)도 있고, 염불(念佛)도 있고, 독경(讀經)도 있고, 예경(禮敬)도 있지만, 종류에 관계없이 내용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나라는 생각을 뽑아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라는 것을 부정해 나가는 공부입니다. 이것이 불교 공부이며, 수행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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