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싫어질 때
사소하거나 거창하거나에 관계없습니다.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들은 다 나름대로의 정당성에 근거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평가가 미흡하다고 여겨지게 되면, 우선 다른 사람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기 힘듭니다. 이만하면 제법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위로부터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가족이나 직장동료마저 시큰둥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좋은 감정이 일어나겠습니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주위 환경이 도저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서면, 십중팔구는 곧 바로 원망의 화살을 자신을 향해 겨누기 시작합니다. ‘내가 오죽이나 못났으면…’ ‘내가 얼마나 박복하면…’ 하는 식의 독백을 덧붙이며, 그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면서 말입니다.
옆집 아들이 잘되는 걸 보면 내 아들이 시원찮아 보이고, 남의 부모가 유산을 많이 남긴 걸 보면 우리 부모가 미워집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자신마저 싫어집니다. 어둠의 덫에 걸려 사는 게 지겹지도 않은지, 이런 못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향해서 비웃는 사람이나,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나 알고 보면 다 피해자입니다. 무엇이 좋고 싫은 지도 확실치 않으면서도, 스스로 싫어하는 상태만 있을 뿐입니다.
훗날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니다이라고 이름한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직업은 똥치기였습니다. 인도에서 똥치기는 그야말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고 해서, 말 그대로 일반인과 정상적인 접촉은 꿈도 꾸지 못할 부류에 속합니다. 직업에 어디 귀천이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한정지으려는 사람에게는 엄연한 게 또한 현실입니다. 조건 없이 세상을 깨끗이 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성(聖)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것을 다른 직업과 비교하여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똥치는 직업은 결코 성스러운 직업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니다이는 결코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그 집안 대대로 그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니다이가 어느 날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그 고장에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방문이었습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供養物)을 준비하고, 설법을 듣겠다고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그런데 니다이만은 한 구석에서 똥을 치고 있었습니다. 신분이 똥치기이다 보니 대중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막상 향해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얼마나 딱한 처지입니까?
그때 마침 부처님을 모신 행렬이 멀리 보입니다. 생각대로라면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지만 막상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천민’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던 그로서는, 사회적인 편견은 그만두고라도, 감히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재빨리 반대방향에 있는 뒷골목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뭔가 바라는 욕구가 있다가도, 이윽고 그런 상황이 닥치면 피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때 니다이의 심경에 대해 경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몸을 갖고 있는 내가 부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은 죄(罪)를 더 짓는 것이다.” 천민인 자신이 부처님께 다가감으로써 존경하는 분에게 누를 끼치게 되리라는 갸륵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니다이가 그랬습니다. 마치 자신의 운명에 순순히 따르려는 듯이 부처님으로부터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니다이가 방향을 바꿔서 도망가는 곳마다 부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피하는 곳마다 부처님이 나타나신 뜻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참생명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입니다. 다가오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너무 간단명료합니다.
“니다이여, 깨끗한 자여, 그대는 좋은 벗이니라.”
똥을 치우는 사람에겐 똥 냄새가 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현상적인 모습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는 그 마음이 깨끗하다고 찬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외면적인 조건이 아니라 참생명 자리를 보셨기에,
“니다이야, 내 손을 잡아라”
고 하시면서 똥 묻은 손을 잡아주십니다. ‘내 제자가 되거라’하는 인가(認可)를 주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삶의 밑바닥까지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상황론(狀況論)을 내세우기에 바쁩니다. 주변과 견주어 보거나 아니면 자신의 특정한 과거를 들먹이면서 지금의 불행을 변명하는데 능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던 때를 반복하거나 학창시절이나 가문의 영광을 되뇌기도 하고, 젊은 날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입에 달고 다닙니다.
자기 불행을 이런 상황론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있다면 아직은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불행 속에서 절망을 맛본다고 하지만, 진정한 절망을 맛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절망한 척하기만 하겠지요. 절망한 척이라도 해서 스스로를 불행한 자라고 위안이나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니다이는 달랐습니다. 자기를 죄 많은 사람이라고 작정을 했습니다. 참으로 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혹 극단적인 상황에서 깜짝 놀랄만한 일을 성취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일지라도 자신에게 없는 능력이 갑자기 발휘되는 게 아닙니다. 미처 스스로 돌아보지 않고 있다 보니 평상시에 쓰지 않고 있던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니다이도 자기가 똥치기라는 현상적인 한계마저 진정한 자신이 아님에 절망함으로써, 비로소 참생명을 만날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해도 더 이상 스스로를 못났다고 한정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통해서, 그의 인생은 반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로부터 참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너는 내 제자가 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대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는 존재이므로, 부처님의 상속자(相續者)라고 이릅니다. 니다이의 참된 생명가치가 똥치기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똥치기를 하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실로 원래부터 어느 벼슬이나 직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사회적인 신분을 갖게 된 것인데, 장기간 익숙하게 살다 보니 그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니다이는 객관적으로 보자면 무척 불행한 사람임에 분명한데, 도리어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살면서 믿고 의지할 현실적인 여지가 전혀 없었기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미련을 둘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보다 낫거나 보다 비참한 상태라고 하는 상대적인 잣대가 처음부터 아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야말로 니다이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그의 참생명만을 보셨습니다. 부처님이 그를 똥치기의 모습을 한 부처님으로 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니다이여, 그대의 마음은 깨끗하니라.”
우리라고 해서 무엇이 그리 다르겠습니까?
만나는 사람들을 부처님생명으로 대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을 자각하고, 세상 사람을 다만 그들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사소하거나 거창하거나에 관계없습니다.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들은 다 나름대로의 정당성에 근거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평가가 미흡하다고 여겨지게 되면, 우선 다른 사람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기 힘듭니다. 이만하면 제법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위로부터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가족이나 직장동료마저 시큰둥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좋은 감정이 일어나겠습니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주위 환경이 도저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서면, 십중팔구는 곧 바로 원망의 화살을 자신을 향해 겨누기 시작합니다. ‘내가 오죽이나 못났으면…’ ‘내가 얼마나 박복하면…’ 하는 식의 독백을 덧붙이며, 그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면서 말입니다.
옆집 아들이 잘되는 걸 보면 내 아들이 시원찮아 보이고, 남의 부모가 유산을 많이 남긴 걸 보면 우리 부모가 미워집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자신마저 싫어집니다. 어둠의 덫에 걸려 사는 게 지겹지도 않은지, 이런 못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향해서 비웃는 사람이나,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나 알고 보면 다 피해자입니다. 무엇이 좋고 싫은 지도 확실치 않으면서도, 스스로 싫어하는 상태만 있을 뿐입니다.
훗날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니다이라고 이름한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그의 직업은 똥치기였습니다. 인도에서 똥치기는 그야말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고 해서, 말 그대로 일반인과 정상적인 접촉은 꿈도 꾸지 못할 부류에 속합니다. 직업에 어디 귀천이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한정지으려는 사람에게는 엄연한 게 또한 현실입니다. 조건 없이 세상을 깨끗이 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성(聖)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것을 다른 직업과 비교하여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똥치는 직업은 결코 성스러운 직업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니다이는 결코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그 집안 대대로 그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니다이가 어느 날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그 고장에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의 방문이었습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供養物)을 준비하고, 설법을 듣겠다고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그런데 니다이만은 한 구석에서 똥을 치고 있었습니다. 신분이 똥치기이다 보니 대중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막상 향해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얼마나 딱한 처지입니까?
그때 마침 부처님을 모신 행렬이 멀리 보입니다. 생각대로라면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지만 막상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천민’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던 그로서는, 사회적인 편견은 그만두고라도, 감히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재빨리 반대방향에 있는 뒷골목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뭔가 바라는 욕구가 있다가도, 이윽고 그런 상황이 닥치면 피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때 니다이의 심경에 대해 경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몸을 갖고 있는 내가 부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은 죄(罪)를 더 짓는 것이다.” 천민인 자신이 부처님께 다가감으로써 존경하는 분에게 누를 끼치게 되리라는 갸륵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니다이가 그랬습니다. 마치 자신의 운명에 순순히 따르려는 듯이 부처님으로부터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니다이가 방향을 바꿔서 도망가는 곳마다 부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피하는 곳마다 부처님이 나타나신 뜻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참생명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입니다. 다가오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너무 간단명료합니다.
“니다이여, 깨끗한 자여, 그대는 좋은 벗이니라.”
똥을 치우는 사람에겐 똥 냄새가 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현상적인 모습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는 그 마음이 깨끗하다고 찬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외면적인 조건이 아니라 참생명 자리를 보셨기에,
“니다이야, 내 손을 잡아라”
고 하시면서 똥 묻은 손을 잡아주십니다. ‘내 제자가 되거라’하는 인가(認可)를 주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삶의 밑바닥까지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상황론(狀況論)을 내세우기에 바쁩니다. 주변과 견주어 보거나 아니면 자신의 특정한 과거를 들먹이면서 지금의 불행을 변명하는데 능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던 때를 반복하거나 학창시절이나 가문의 영광을 되뇌기도 하고, 젊은 날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입에 달고 다닙니다.
자기 불행을 이런 상황론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있다면 아직은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불행 속에서 절망을 맛본다고 하지만, 진정한 절망을 맛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절망한 척하기만 하겠지요. 절망한 척이라도 해서 스스로를 불행한 자라고 위안이나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니다이는 달랐습니다. 자기를 죄 많은 사람이라고 작정을 했습니다. 참으로 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혹 극단적인 상황에서 깜짝 놀랄만한 일을 성취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일지라도 자신에게 없는 능력이 갑자기 발휘되는 게 아닙니다. 미처 스스로 돌아보지 않고 있다 보니 평상시에 쓰지 않고 있던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니다이도 자기가 똥치기라는 현상적인 한계마저 진정한 자신이 아님에 절망함으로써, 비로소 참생명을 만날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해도 더 이상 스스로를 못났다고 한정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통해서, 그의 인생은 반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로부터 참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너는 내 제자가 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대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는 존재이므로, 부처님의 상속자(相續者)라고 이릅니다. 니다이의 참된 생명가치가 똥치기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이 똥치기를 하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실로 원래부터 어느 벼슬이나 직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사회적인 신분을 갖게 된 것인데, 장기간 익숙하게 살다 보니 그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니다이는 객관적으로 보자면 무척 불행한 사람임에 분명한데, 도리어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살면서 믿고 의지할 현실적인 여지가 전혀 없었기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미련을 둘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보다 낫거나 보다 비참한 상태라고 하는 상대적인 잣대가 처음부터 아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야말로 니다이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그의 참생명만을 보셨습니다. 부처님이 그를 똥치기의 모습을 한 부처님으로 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니다이여, 그대의 마음은 깨끗하니라.”
우리라고 해서 무엇이 그리 다르겠습니까?
만나는 사람들을 부처님생명으로 대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을 자각하고, 세상 사람을 다만 그들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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