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무한생명의 자각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과연 누가 죽였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소련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람이었기에, 그 결말은 자못 궁금합니다. 그의 살인행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광범위했다 합니다. 한때는 자신의 혁명동지였던 사람으로부터 트로츠키계열의 반대파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의 인명을 파리 목숨보다 못할 만큼 취급했던 살인마였지요. 이는 공산정권이 붕괴된 지금까지도 확실한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짐작의 수준을 맴도는 것만 보아도 그의 잔인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모든 폭력의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스탈린의 나날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원한을 품은 사람의 해코지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주변은 항상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이기 마련이었습니다. 잠자리마저도 편치 않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그는 모스크바 근교의 숲속에 비밀별장을 특별히 짓고는, 똑같은 침실을 4개씩이나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어느 방에서 자는지 모르게 하려는 나름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방문도 밖에서는 절대 열지 못하게 자기가 실내에서 전동버튼을 눌러야 열리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고혈압이라는 치명적인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는 1953년 3월 1일.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샤워를 마친 스탈린은 침대 옆에 쓰러지고 맙니다. 그렇지만 바로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4일 동안을 신음하며 목숨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런 급박한 상황을 맞아 밖에서는 무책임하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경비병을 비롯한 주변의 인물들은 철통같은 경비에 매진하는 것만이 그들의 임무였기에 감히 침실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결국 낌새를 눈치 챈 경비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갔을 때는 주검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스탈린은 스스로를 죽음의 방에 가두고는 구명열쇠를 손에 쥔 채 죽어갔습니다.
이미 예비된 죽음에 대한 교훈을 극적으로 설명하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와 경우는 다르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방에 갇혀 지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불변(不變)하는 진실로 한정시키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대하는 사건들마다는 위협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초조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마구 분주하면서도 신경질의 연속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설명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젓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자신을 마주하고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조금이라도 끝없이 남의 핑계 찾기에 여념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죽으려고 작정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신활동이나 물질적인 생활 모두를 포괄하는 전생명(全生命)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자신이 위축되어 끝내는 소멸되고 만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묵묵히 지내려 한다면, 어리석다는 남의 당연한 평가는 차치해 두고라도 아마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도 참으로 멋진 선지식이 계십니다.
예전에 돌아가신 공병우선생이 바로 그분입니다. 입지전적인 안과의사로서 또한 끝없는 한글사랑을 구현하고자 최초로 한글타자기를 고안하신 분으로 알려진 분 말입니다. 왜 하필 이런 시간에 고인이 되신 분을 거론하려는가? 진정으로 나를 살리려는 길을 찾아 떠나는 우리들에게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말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유언장에 이르기를, ‘자신이 죽더라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자신의 죽음 때문에 남들을 번잡하게 하면 안 된다. 또한 장례식도 치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혹시 쓸 만한 장기(臟器)가 있다면 의학실험용으로 써 달라’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매몰찰 정도의 마지막 당부를 후손들에게 남기고 그는 떠나갔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얼핏 받아들이기에 쑥스런 유언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지금의 심리적인 상태가, 곧 우리들의 원래 마음도 공선생과 다름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모님의 은덕으로 육체를 빌어 쓰는 일생을 보냄에 있어서,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란 내가 탐낸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 속에서 완성시킬 때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즉 육체는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생성되어 가는 존재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육체가 진정으로 그 존재이유를 가지려면 완전히 써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의 경우를 봅시다.
동일한 물이지만 그 쓰임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갖가지입니다. 먹어야 할 때는 음료수가 됩니다. 씻어야 할 때는 세숫물이 된다. 농사에 쓰일 때는 농업용수가 됩니다.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동력수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물의 용도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무궁무진하기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라는 것도 제한된 의미로만 대한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남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무한히 활용해서 세상을 향해 베풀라고 우리의 육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마다 육체로 비롯된 자신에 대한 점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곧 육체만이 내 인생이라는 한정된 사고방식에 대한 전면 거부를 뜻합니다.
왜냐? 육체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선생의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열심히 육체를 활용했던 사람도 죽음이라는 현상을 맞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쓰던 육체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남의 도움이 없다면 육체의 마지막 활용도 불가능하기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가 만약 영원히 나의 것이라면, 언제 어떤 경우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당해서 내가 나의 육체를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에 미뤄 본다면, ‘육체=나’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육체≦나’를 향해 열린 인생을 가꿔 가야 합니다. 행여 나만의 방에 틀어박히기를 즐기는 것이 참된 인생이라고 작정하는 사람만은 예외겠지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자신의 닫힌 방문을 열어야 합니다.
나의 방문을 연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방문을 걸어 잠근 사람이 나 자신이기에 열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는 없습니다. 방안에 갇혀 있는 한 아무도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이 없기에 살려면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이제까지 유지해 왔던 삶의 방식에 대한 포기를 뜻하며, 지난 삶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길에서 사먹는 번데기란, 누에고치가 스스로 실을 자아서 갇힌 형상으로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에고치가 만일 누에고치로만 그 생명을 중단하고 싶다면 굳이 자기 몸뚱이를 얽어매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무한한 성장을 위해서는, 나방이 되어 날아가려 한다면 누에고치라는 육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제한된 육체는 죽어야 합니다. 껍질을 벗고 하늘을 훨훨 날아가기 위해서···
그렇지만 나만의 방문을 여는 것이 일회적인 해프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기에, 열어야 할 나의 방문도 그만큼 많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일수록 잠궈논 나름의 방문도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어야 할 방문이 많다는 것은 따분하고 지겨운 운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취해야 할 것이 그만큼 많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를 더 정확히 설명한다면, 방문이 열려서 성취하는 생명의 확장이 이뤄진다는 것은 이미 성취되어진 나의 완전한 생명을 확인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설탕을 먹는 사람에게 당신은 단맛을 언제 따로 먹느냐고 묻는다면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만의 방문을 여는 순간마다 무한한 나의 참생명은 나의 것이 됩니다. 원래부터 나의 것이므로···
이와 같이 우리 생명의 절대가치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가꿔 가는 만큼 무한한 발견은 항상 기다리고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발견이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나의 방문을 열기 위한 구체적인 생명의 몸부림이 없다면 어림 반 푼 어치도 가당치 않을 일입니다.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서 손끝도 꼼짝하지 않으면서 문이 열리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문이 열릴 턱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도 굳게 믿어왔던 내 방의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아야 합니다. 이때를 일러 우리는 기도(祈禱)라고 하지 않던가요?
나의 무한생명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아직은 열쇠를 손에 쥔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얼음과 같이 내 방속에서 얼어붙어 왔습니다. 애써 녹지 않으려고 그렇게 버텨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방문을 열려고 합니다. 따라서 얼음 상태에 있는 나를 녹여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진행될수록 문 앞에 다가갈 만큼 녹을 것입니다. 유연한 몸짓과 생각으로 열쇠구멍을 찾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아닙니다. 녹은 물은 바닥을 흐를 뿐입니다. 형체를 갖고 나를 주장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 열을 가해야 합니다. 모든 나만의 방에 틀어박힌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기도의 성취는 완전치 못합니다. 증기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열쇠구멍으로 스며들어 가야 합니다. 각자의 방에서 얼어붙은 채로 무한생명의 성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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