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엇으로 태어나고 있는가
살아오면서 여태껏 나라고 주장하였고, 앞으로도 결코 그 기세를 꺾을 것 같지 않은 많은 조건(條件)들이 엄연합니다. 그러나 조건들, 물론 그것이야말로 본연의 자기라는 근본적인 착각의 틀이지만, 이를 제외하고서 또 따로 존재하는 나는 과연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남자·여자라고 하는 성별(性別)도 떼고, 불리는 이름도 떼고, 사회적인 지위도 떼고, 노소간(老少間)의 나이도 떼고서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다 떼고 나면, 그때 남는 것은 과연 누구입니까?
은행원으로 있던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럼 은행원이란 직업이 없어집니까? 대통령으로 있던 사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럼 대통령이란 직책이 없어집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세상의 조건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본래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며, 태어나서 택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붙였든 할아버지가 붙였든, 아무튼 여러분이 혼자 태어나자마자 ‘나는 누구야’라고 주장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 이름조차도 태어나자마자 누군가 붙여줬을 따름입니다.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은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만히 살펴보세요. 전혀 새삼스럽지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익숙해지니까 그게 난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선 그냥 그렇게 죽을 때까지 그게 나인 걸로 착각하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태어나실 때의 광경에 대한 기록 가운데, 어머니이신 ‘마야부인이 무우수나무 가지를 잡으시고’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우(無憂)란, 말 그대로 걱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걱정 없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걱정을 안 해보나?”
혹시 이렇게 한숨 섞인 넋두리를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데 진짜 문제는 걱정 없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걱정의 정체(正體)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뭘 제대로 알아야 해결하고 말고 할 게 아닙니까?
그럼 걱정의 정체를 마주하기로 합시다.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무 간단해서 싱겁기까지 합니다.
“과거(過去)에 저질러놓은 것이 지금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
“내일 곗돈을 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이처럼 걱정에는 과거시제에 속하는 것과 미래시제의 것이 있습니다. 결국 현재의 걱정은 본래부터 없다는 말이 됩니다. 실로 걱정은 과거에 말미암거나 미래의 것을 끌어오거나 하는 둘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제야말로 조건화(條件化)된 자신을 세차게 몰아붙여야 합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모질게 하는 것보다는 더 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너무나 확실합니다. 조건화된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조건화는 그것이 어떤 상태이든 자기생명의 덫입니다. 과거에 익숙했던 나, 또는 미래에 무엇이 될 나는 펄떡이는 오늘을 사는 내가 아닙니다. 꿈과 같은 허상(虛想)이 바로 걱정의 정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재 숨 쉬고 있는 나, 지금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걱정은 본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걱정을 안 하면 안 되는 양, 마치 태어날 때부터 걱정하기를 작정한 듯이 사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심리학의 유명한 개념 중에 가면논리라는 게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사람을 뜻하는 person이라는 영어 단어가, 가면(假面)을 뜻하는 라틴어의 persona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저 사람(person)’이라고 할 때, ‘나에게 나타나 보이는 저 가면을 쓴 사람’이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몇 개의 가면이 있습니까?
싯다르타도 훗날 석가모니부처님으로 불리시기 전까지는 그런 조건화된 상태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카필라라는 조그만 나라 왕자의 가면을 쓴 적도, 고행주의자의 가면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깨치시고 난 후 석가모니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제대로 대한 사람도 있지만, 얼토당토않은 험담을 늘어놓으며 모함에 급급한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라는 익숙한 조건을 앞세우려는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뿐입니다.
우리들의 가면은 몇 가지나 될까요? 혹시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 오신날이란, 가면 이전의 본래면목을 마주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만나며 뒤집어 쓴, 갖가지로 조건화된 가면을 벗는 바로 그날입니다. 그리하여 최초로 세상에 드러난 가면보다 최소한 앞선 자신의 참생명을 잊지 않는 날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오심을 맞으면서도 또 하나의 가면을 쓰려고 한다면, 이는 자신의 참생명인 부처님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내 등(燈)이 걸렸구나.”
“내 등이 더 빛나는 것 같구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내 가면을 벗고 참생명이 어둠에 가림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날임과 동시에 앞으로도 그렇게 살리라고 결단하는 날이다.”
이렇게 자리매김하자는 얘기입니다.
사실 이 가면을 못 벗을 때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나름대로 살면서 하찮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특별한 사람만 노력하고 삽니까? 돈을 더 벌어보겠다고, 남들한테 이름 좀 나겠다고, 좋은 성적을 올려보겠다고 온갖 할 짓 못할 짓 가리지 않고 다들 몸부림치며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시고서 다섯 분의 최초 제자들과 함께 어느 언덕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나라의 국무총리격인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의 외아들인 야사(耶舍)가 다른 고관대작들의 아들들과 대낮에 야외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노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다들 모여 신나게 놀다가 만취한 채로 그 자리에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갈증이 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같이 놀던 친구들과 여인들의 자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멋있었고 매력이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추잡하게 누워있는 몰골들에 큰 충격을 받은 야사는 강가로 달려가서 세수합니다. 세수를 하며 골똘히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실컷 놀아보고 실컷 먹어보고 실컷 가져 봐도 왜 나는 점점 더 불안(不安)해질까?”
이제 야사는 자살을 꿈꿉니다. 이 상태로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때 석가모니부처님이 제자 다섯 분과 같이 산등성이를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고요히 걷는 그 분들의 자태를 본 야사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거기 가는 수행자여, 말 한마디 합시다.”
야사는 지금 끝없이 쫒기고 있는데, 저쪽에 걸어가시는 분은 너무나 평안해 보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수행자여, 그쪽 언덕[피안(彼岸)]에 계신 수행자여.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평안합니까?”
그때 부처님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쪽 언덕[彼岸]에 있는 자여, 이쪽 언덕[此岸]으로 건너오라.”
야사의 눈에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신 곳이 너무 편안한 곳이고 평화의 땅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보니 저분들은 보통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저쪽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떠나고 싶어하는 이 언덕이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또 피안으로 보입니다. 결국 알고 보니 피안이 차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야될 유토피아가 알고 보니 여태까지 서있던 땅이더라.’‘내가 찾아가야 될 사람이 알고 보니까 지금 만나는 사람이더라.’‘소중한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빼놓고는 없더라.’ 이것이야말로 삶의 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안은 추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참생명을 만나는 때와 곳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누구와 몇 년 사귀었다거나 그 사람의 과거를 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측 가능한 통계숫자를 갖다 들이대고 저 사람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가면을 벗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일도 어제도 아닙니다.
참으로 나는 뭘까?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하는 자가 3천 년 전을 따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뒷전이고 내생(來生)을 기약해서 뭘 어쩌자는 말입니까?
다만 ‘지금 내가 무엇으로 태어나고 있느냐?’만이 진정한 내 삶일 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살아오면서 여태껏 나라고 주장하였고, 앞으로도 결코 그 기세를 꺾을 것 같지 않은 많은 조건(條件)들이 엄연합니다. 그러나 조건들, 물론 그것이야말로 본연의 자기라는 근본적인 착각의 틀이지만, 이를 제외하고서 또 따로 존재하는 나는 과연 있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남자·여자라고 하는 성별(性別)도 떼고, 불리는 이름도 떼고, 사회적인 지위도 떼고, 노소간(老少間)의 나이도 떼고서 말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다 떼고 나면, 그때 남는 것은 과연 누구입니까?
은행원으로 있던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럼 은행원이란 직업이 없어집니까? 대통령으로 있던 사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럼 대통령이란 직책이 없어집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세상의 조건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본래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며, 태어나서 택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붙였든 할아버지가 붙였든, 아무튼 여러분이 혼자 태어나자마자 ‘나는 누구야’라고 주장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 이름조차도 태어나자마자 누군가 붙여줬을 따름입니다.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은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만히 살펴보세요. 전혀 새삼스럽지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익숙해지니까 그게 난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선 그냥 그렇게 죽을 때까지 그게 나인 걸로 착각하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태어나실 때의 광경에 대한 기록 가운데, 어머니이신 ‘마야부인이 무우수나무 가지를 잡으시고’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우(無憂)란, 말 그대로 걱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걱정 없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걱정을 안 해보나?”
혹시 이렇게 한숨 섞인 넋두리를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데 진짜 문제는 걱정 없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걱정의 정체(正體)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뭘 제대로 알아야 해결하고 말고 할 게 아닙니까?
그럼 걱정의 정체를 마주하기로 합시다.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무 간단해서 싱겁기까지 합니다.
“과거(過去)에 저질러놓은 것이 지금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
“내일 곗돈을 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이처럼 걱정에는 과거시제에 속하는 것과 미래시제의 것이 있습니다. 결국 현재의 걱정은 본래부터 없다는 말이 됩니다. 실로 걱정은 과거에 말미암거나 미래의 것을 끌어오거나 하는 둘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제야말로 조건화(條件化)된 자신을 세차게 몰아붙여야 합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모질게 하는 것보다는 더 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너무나 확실합니다. 조건화된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조건화는 그것이 어떤 상태이든 자기생명의 덫입니다. 과거에 익숙했던 나, 또는 미래에 무엇이 될 나는 펄떡이는 오늘을 사는 내가 아닙니다. 꿈과 같은 허상(虛想)이 바로 걱정의 정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재 숨 쉬고 있는 나, 지금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걱정은 본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걱정을 안 하면 안 되는 양, 마치 태어날 때부터 걱정하기를 작정한 듯이 사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심리학의 유명한 개념 중에 가면논리라는 게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사람을 뜻하는 person이라는 영어 단어가, 가면(假面)을 뜻하는 라틴어의 persona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저 사람(person)’이라고 할 때, ‘나에게 나타나 보이는 저 가면을 쓴 사람’이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몇 개의 가면이 있습니까?
싯다르타도 훗날 석가모니부처님으로 불리시기 전까지는 그런 조건화된 상태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카필라라는 조그만 나라 왕자의 가면을 쓴 적도, 고행주의자의 가면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깨치시고 난 후 석가모니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제대로 대한 사람도 있지만, 얼토당토않은 험담을 늘어놓으며 모함에 급급한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라는 익숙한 조건을 앞세우려는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뿐입니다.
우리들의 가면은 몇 가지나 될까요? 혹시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 오신날이란, 가면 이전의 본래면목을 마주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만나며 뒤집어 쓴, 갖가지로 조건화된 가면을 벗는 바로 그날입니다. 그리하여 최초로 세상에 드러난 가면보다 최소한 앞선 자신의 참생명을 잊지 않는 날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오심을 맞으면서도 또 하나의 가면을 쓰려고 한다면, 이는 자신의 참생명인 부처님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내 등(燈)이 걸렸구나.”
“내 등이 더 빛나는 것 같구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내 가면을 벗고 참생명이 어둠에 가림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날임과 동시에 앞으로도 그렇게 살리라고 결단하는 날이다.”
이렇게 자리매김하자는 얘기입니다.
사실 이 가면을 못 벗을 때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나름대로 살면서 하찮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특별한 사람만 노력하고 삽니까? 돈을 더 벌어보겠다고, 남들한테 이름 좀 나겠다고, 좋은 성적을 올려보겠다고 온갖 할 짓 못할 짓 가리지 않고 다들 몸부림치며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시고서 다섯 분의 최초 제자들과 함께 어느 언덕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나라의 국무총리격인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의 외아들인 야사(耶舍)가 다른 고관대작들의 아들들과 대낮에 야외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노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다들 모여 신나게 놀다가 만취한 채로 그 자리에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갈증이 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같이 놀던 친구들과 여인들의 자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멋있었고 매력이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추잡하게 누워있는 몰골들에 큰 충격을 받은 야사는 강가로 달려가서 세수합니다. 세수를 하며 골똘히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실컷 놀아보고 실컷 먹어보고 실컷 가져 봐도 왜 나는 점점 더 불안(不安)해질까?”
이제 야사는 자살을 꿈꿉니다. 이 상태로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때 석가모니부처님이 제자 다섯 분과 같이 산등성이를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고요히 걷는 그 분들의 자태를 본 야사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거기 가는 수행자여, 말 한마디 합시다.”
야사는 지금 끝없이 쫒기고 있는데, 저쪽에 걸어가시는 분은 너무나 평안해 보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수행자여, 그쪽 언덕[피안(彼岸)]에 계신 수행자여.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평안합니까?”
그때 부처님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쪽 언덕[彼岸]에 있는 자여, 이쪽 언덕[此岸]으로 건너오라.”
야사의 눈에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신 곳이 너무 편안한 곳이고 평화의 땅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보니 저분들은 보통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저쪽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떠나고 싶어하는 이 언덕이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또 피안으로 보입니다. 결국 알고 보니 피안이 차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야될 유토피아가 알고 보니 여태까지 서있던 땅이더라.’‘내가 찾아가야 될 사람이 알고 보니까 지금 만나는 사람이더라.’‘소중한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빼놓고는 없더라.’ 이것이야말로 삶의 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안은 추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참생명을 만나는 때와 곳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누구와 몇 년 사귀었다거나 그 사람의 과거를 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측 가능한 통계숫자를 갖다 들이대고 저 사람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가면을 벗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일도 어제도 아닙니다.
참으로 나는 뭘까?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하는 자가 3천 년 전을 따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뒷전이고 내생(來生)을 기약해서 뭘 어쩌자는 말입니까?
다만 ‘지금 내가 무엇으로 태어나고 있느냐?’만이 진정한 내 삶일 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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