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필연적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방식은 달라도, 나름대로의 생명력인 업(業)의 흐름은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신업(身業)을, 언어적으로는 구업(口業)을,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의업(意業), 즉 삼업(三業)을 지으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이란, ‘삼업(三業)을 짓고 그에 따른 보(報)를 받는 연속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살고 못사는 것을 따지기에 앞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결단하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바람직한 결과란 그에 걸맞는 원인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할까요?
불가(佛家)에서는 예로부터 여섯 가지 조화로운 삶의 양태를 이상적이라고 찬양해왔습니다. 육화경(六和敬)으로 널리 알려진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가 화합하여 함께하는 생활을 뜻하는 신화공주(身和共住)입니다.
가족끼리 한 지붕 아래 잠자리에 든다고 해서 꿈자리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제각기 따로따로 다른 세상을 꿈꿉니다. 마찬가지로 일상 활동을 하며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도,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게 정상입니다. 이는 곧 몸뚱이만으로 만나는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현상적으로 동일한 몸뚱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몸뚱이는 자신의 참생명인 법신(法身)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건 간에 그 또는 그녀의 모습으로 한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제대로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법신과 법신끼리, 아니 다만 법신이라는 한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로 그러나 똑같은 생명의 자리로부터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기 나는 말로 서로를 북돋는 구화무쟁(口和無諍)입니다.
일반적인 광경이지만, 입만 열었다 하면 제 자랑을 늘어놓거나 남의 흉을 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군대시절의 얘기로 핏대를 올리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고된 시집살이를 한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토(吐)를 다는데, 그 내용이란 게 자신의 정당성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추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노는 입에 염불하라고 하겠습니까?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키고 말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부처님으로 칭찬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밉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를 향한 그런 어두운 마음이 입에서 튀어나가기 전에, 빨리 그 사람의 장점(長點)이나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그것을 인정하고 볼 일입니다.
언어(言語)의 힘은 결코 무시할 바가 아닙니다. 감사하고 나면, 그에 따라서 감사의 샘이 솟아오릅니다. 허물없는 친구라고 여겨서 “저 미친놈은 말이야!” 하는 식의 말을 자꾸 하다보면, 어느 날 진짜 미친놈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장난이나마 시작한 욕이 잦아지면 정말 욕처럼 전개됩니다.
더구나 입에서 나온 말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바로 말한 당사자입니다. 누군가를 흉보았을 때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은 두 번째이고, 그 어두운 그림자는 제일 먼저 욕한 당사자를 덮어버립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의 현실은 어두워집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되도록’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감사하는’ 말로만 대화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하며 일을 성취하는 의화동사(意和同事)입니다.
작금의 세태는 참으로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주장을 관철하기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분위기입니다. 자신은 빼놓고 다른 사람들을 온통 독단(獨斷)으로 몰았으니, 어찌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설사 한때나마 뭔가 되는 듯싶다가도, 별 것도 아닌 데서 이견(異見)이 빚어져 틀어져버린 아쉬운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처지만 불쌍한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독단(獨斷)의 횡포를 휘두르는 데 있어서, 본인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세상이 내 뜻에 맞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억지를 넘어선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혀 돌파구는 없을까요?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관점은 바꿀 수가 있습니다. 선택의 열쇠를 본인이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점을 바꾸게 되면 여태까지 미처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됩니다. 없던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있었으므로 가능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의 깊고 넓은 뜻을 존중하여 찬탄하게 되고, 그 찬탄으로 말미암아 더불어 하는 일마다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되고 맙니다.
네 번째는 어떤 조건보다 생명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계화동수(戒和同修)입니다.
율(律)과 계(戒)는 엄연하게 구분됩니다. 율이란 특정 집단에서 지켜야 될 하나의 규범을 가리킵니다. 집안에는 가규(家規)가 있고, 학교에는 학칙(學則)이 있고, 깡패들끼리도 율은 있습니다. ‘배반하면 죽인다’면서 같은 문신을 하고는 율 지키기를 맹세합니다. 율은 이처럼 일정한 범주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을 잘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계를 잘 지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계란 생명의 원리를 뜻합니다. 때문에 상대적 존재인 ‘나’는 계를 지키지 못한다는 역설(逆說)이 성립됩니다. 이 역설을 생각해 봅시다.
사회적인 틀을 앞세운 사람은, 자신이 인정한 범주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다른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그 경계를 넘어설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한 예로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들어 모순과 마주해 봅시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살생을 안 할 자신이 있습니까? 만약 부엌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나 윙윙거리며 피를 빠는 모기를 가만히 구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나아가 보기로 합시다. 항상 조심을 하며 걸어 다니면, 땅을 기는 벌레를 한 마리도 밟지 않고 다닐 자신이 있습니까?
‘나’라는 상대적인 존재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계를 지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한시나마 세상으로부터 공급되는 양식이나 지식 등과 같은 도움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살지 못합니다. 세상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생명의 원리만은 역연(歷然)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명의 원리인 계를 삶의 윗자리에 두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눈앞에 산 자로 나타나든 사자(死者)로 다가오든 상관없습니다. 출세를 했든 또는 거렁뱅이가 되었든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생명의 원리를 근거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각자 생명의 고결함과 존중을 잃지 않는 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때 계를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화합을 하겠습니까? 타협이 아닙니다. 타협이란 모순은 그대로 놓아둔 채 적당히 상황을 얼버무리려는 적당주의의 산물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불거질 문제를 안고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미봉책일 따름입니다. 삶이란 투쟁을 통한 쟁취(爭取)가 아닙니다. 계에 근거한 지향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삶을 이해(理解)하려는 태도를 함께 하는 견화동해(見和同解)입니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견해가 있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물을 쳐다보면서, ‘어쩜 그렇게나 다를까?’하며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한강 물을 쳐다보면서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럽다고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견해가 다른 이유는 별스러운 데 있지 않습니다. 단지 ‘나’라는 자(者)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것도 물질적이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물질적인 상태도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주인공이며, 상대적인 변화의 주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물질이 아닌 생명이듯이, 만나는 사람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세상살이는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또 다른 자신의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자식이란 이름의 나의 다른 생명이고, 부모라는 이름의 나의 다른 생명, 동창이라는 이름의 나의 다른 생명으로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생명자리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사는 가운데 이익이 있다면 조화롭게 나눈다는 이화동균(利和同均)입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게 있으면 저 먼저 챙기는 인심(人心)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차츰 주변으로 확대해 갑니다. 부모, 자식, 형제자매 등 기존의 인정된 사람 순으로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부터 챙기려고 하니, 끝없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그만두고라도, 자신의 만족이 어디까지인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언제나 공염불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본래 우린 몸뚱이마저도 원래 내 것으로 갖고 온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준 것입니다. 몸뚱이가 본래 내 것이 아닌데, 이외의 다른 것은 두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억지일 따름입니다. 세상이 살려주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은 없습니다. 물질적 잣대를 들이밀 염치도 없는 게 삶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간단해집니다. 이화동균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원칙을 태어나면서부터 살려지고 있다는 데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단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곧 받은 만큼 주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뿐더러 믿는 대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기에 행복할 따름입니다.
자, 우리 모두 행복을 꿈꾸기만 할 게 아닙니다.
이와 같이 육화경(六和敬)으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게 어찌 어렵기만 하겠습니까?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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