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말씀하시기를,
“관세음보살은 모든 괴로움과 액난에서 벗어났다[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고 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괴로움과 액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내 밖에 계신 부처님께 “저의 괴로움과 액난을 제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서 벗어났을까요?
《반야심경》에 말씀하시기를 관세음보살은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함[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으로써 무한절대의 지혜를 드러내신다고 하였습니다. ‘무한절대의 지혜를 드러낸다’는 말은 육신생명의 세계를 벗어나 진실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즉 ‘나무(南無)’하는 것입니다. 진실생명의 세계는 특별한 곳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본래부터 완전히 구족되어 있는 세계이며, 이러한 진실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일러 바라밀다(波羅蜜多)라 합니다.
그러므로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란, 더 이상 육신생명ㆍ중생생명으로 살지 않고 ‘본래부터 무한절대생명인 나의 참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관세음보살은 항상 ‘나무아미타불’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관세음보살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의 중앙에는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정대(頂戴)하고 계십니다. 아미타부처님이 나의 진실생명임을 알고,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염불(念佛)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지, 왜 나무아미타불을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님이야말로 부지런히 ‘나무아미타불’하고 계신 분임을 생각하면, 이런 의문은 사라질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이르시기를 아미타부처님이 나의 진실생명임을 믿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했더니,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비추어보았다고 합니다[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서 우리의 몸뚱이[색(色)]와 정신작용[수상행식(受想行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온을 ‘나’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오온이 ‘나’라고 하면 결국 남들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행심반야바라밀다를 하여 오온이 본래부터 공(空)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몸뚱이[색(色)]는 참으로 있지 않고 흘러가는 현상에 지나지 않구나! 또한 우리의 정신작용도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우는 것일 뿐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온이라는 것이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실생명도 아님을 깨달으시니,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즉 모든 괴로움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의 괴로운 현실에 대하여 ‘액난(厄難)이나 삼재(三災)가 들었다’고 아우성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은 내 밖의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괴로움의 원인이 내 밖에 있다면, 나에게 괴로움과 액난을 주신 분께 기도해서 없애달라고 하면 되지만, 실제로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서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봄으로써 괴로움은 본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괴로움, 장애, 혹은 몸에 있는 병이라든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든지, 대립과 불화, 원망, 다툼, 이런 것들은 언뜻 보기에는 내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 밖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절대자에게 “나한테 있는 이런 괴로움을 없애 주십시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는 어둠 속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기도이고, 바로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입니다.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함으로써 우리의 참생명이 아미타[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내세우고 남들과 대립하고 살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기도는 나에게 있는 부족함을 남으로부터 보충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나에게 있는 액난, 괴로움, 병고, 근심을 없애 달라고 내 밖에 있는 누구에게 기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완벽한 생명을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참생명을 볼 수는 없을지라도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있지도 않은 것을 특별히 없애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본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주시기 위해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부처님이며, 불자(佛子)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맞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나무(南無)하는 것입니다.
나무(南無)란, 지금까지는 몸뚱이에 바탕을 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살았는데,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것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사라지면 본래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는 것처럼, ‘나무!’했을 때 우리의 본래 진실생명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것이 믿음입니다.
불교의 기도는 밖을 향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음을 고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데 간혹 불교의 기도와 최면술의 암시(暗示)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여러 가지 암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암시 때문에 우리가 중생 노릇을 되풀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듯 온통 암시에 매여 살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암시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특정 종교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그런 암시를 가지고 술수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큰 도력(道力)이 있는 줄 알고 따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암시에 매이게 만드는 것이므로 아주 해롭습니다.
사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수많은 암시 속에 지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흘을 굶으면 굶어죽을 판에 도둑질 안 할 놈이 없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들으면서 ‘사흘만 굶으면 죽는구나’라는 암시를 가지게 됐습니다. 사흘 굶는다고 죽는 것은 아닌데도 그릇된 암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굶어도 죽나보다 하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간혹 “우리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설사 병이 나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병이 났다’는 암시로부터 ‘병이 나았다’는 새로운 암시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암시가 됐든, 바른 암시가 됐든 그 암시에 매여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암시에 걸려들어 구속받고 있는 삶일 뿐, 우리의 진실생명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일체 모든 암시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불자라면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모든 암시로부터 벗어나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 되고 절대무한인 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괴로움과 액난은 본래 없는 것임이 밝혀집니다. 액난이 본래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것이지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고 지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절대 긍정하는 것입니다.
염불과 독송을 하면 우리를 구속하는 세상의 모든 암시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 의심,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생각 등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할 때 본래 우리들의 참된 생명가치가 남김없이 드러납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말씀하시기를,
“관세음보살은 모든 괴로움과 액난에서 벗어났다[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고 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괴로움과 액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내 밖에 계신 부처님께 “저의 괴로움과 액난을 제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서 벗어났을까요?
《반야심경》에 말씀하시기를 관세음보살은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함[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으로써 무한절대의 지혜를 드러내신다고 하였습니다. ‘무한절대의 지혜를 드러낸다’는 말은 육신생명의 세계를 벗어나 진실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즉 ‘나무(南無)’하는 것입니다. 진실생명의 세계는 특별한 곳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본래부터 완전히 구족되어 있는 세계이며, 이러한 진실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일러 바라밀다(波羅蜜多)라 합니다.
그러므로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란, 더 이상 육신생명ㆍ중생생명으로 살지 않고 ‘본래부터 무한절대생명인 나의 참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관세음보살은 항상 ‘나무아미타불’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관세음보살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의 중앙에는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정대(頂戴)하고 계십니다. 아미타부처님이 나의 진실생명임을 알고,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염불(念佛)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지, 왜 나무아미타불을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님이야말로 부지런히 ‘나무아미타불’하고 계신 분임을 생각하면, 이런 의문은 사라질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이르시기를 아미타부처님이 나의 진실생명임을 믿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했더니,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비추어보았다고 합니다[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서 우리의 몸뚱이[색(色)]와 정신작용[수상행식(受想行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온을 ‘나’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오온이 ‘나’라고 하면 결국 남들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행심반야바라밀다를 하여 오온이 본래부터 공(空)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몸뚱이[색(色)]는 참으로 있지 않고 흘러가는 현상에 지나지 않구나! 또한 우리의 정신작용도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우는 것일 뿐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온이라는 것이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실생명도 아님을 깨달으시니,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즉 모든 괴로움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의 괴로운 현실에 대하여 ‘액난(厄難)이나 삼재(三災)가 들었다’고 아우성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은 내 밖의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괴로움의 원인이 내 밖에 있다면, 나에게 괴로움과 액난을 주신 분께 기도해서 없애달라고 하면 되지만, 실제로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서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봄으로써 괴로움은 본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괴로움, 장애, 혹은 몸에 있는 병이라든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든지, 대립과 불화, 원망, 다툼, 이런 것들은 언뜻 보기에는 내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 밖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절대자에게 “나한테 있는 이런 괴로움을 없애 주십시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는 어둠 속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기도이고, 바로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입니다.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함으로써 우리의 참생명이 아미타[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내세우고 남들과 대립하고 살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기도는 나에게 있는 부족함을 남으로부터 보충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나에게 있는 액난, 괴로움, 병고, 근심을 없애 달라고 내 밖에 있는 누구에게 기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완벽한 생명을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참생명을 볼 수는 없을지라도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있지도 않은 것을 특별히 없애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본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주시기 위해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부처님이며, 불자(佛子)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맞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나무(南無)하는 것입니다.
나무(南無)란, 지금까지는 몸뚱이에 바탕을 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살았는데,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것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사라지면 본래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는 것처럼, ‘나무!’했을 때 우리의 본래 진실생명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것이 믿음입니다.
불교의 기도는 밖을 향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음을 고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데 간혹 불교의 기도와 최면술의 암시(暗示)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여러 가지 암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암시 때문에 우리가 중생 노릇을 되풀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듯 온통 암시에 매여 살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암시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특정 종교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그런 암시를 가지고 술수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큰 도력(道力)이 있는 줄 알고 따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암시에 매이게 만드는 것이므로 아주 해롭습니다.
사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수많은 암시 속에 지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흘을 굶으면 굶어죽을 판에 도둑질 안 할 놈이 없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들으면서 ‘사흘만 굶으면 죽는구나’라는 암시를 가지게 됐습니다. 사흘 굶는다고 죽는 것은 아닌데도 그릇된 암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굶어도 죽나보다 하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간혹 “우리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설사 병이 나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병이 났다’는 암시로부터 ‘병이 나았다’는 새로운 암시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암시가 됐든, 바른 암시가 됐든 그 암시에 매여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암시에 걸려들어 구속받고 있는 삶일 뿐, 우리의 진실생명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일체 모든 암시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불자라면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모든 암시로부터 벗어나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 되고 절대무한인 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괴로움과 액난은 본래 없는 것임이 밝혀집니다. 액난이 본래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것이지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고 지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절대 긍정하는 것입니다.
염불과 독송을 하면 우리를 구속하는 세상의 모든 암시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 의심,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생각 등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할 때 본래 우리들의 참된 생명가치가 남김없이 드러납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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