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念佛이 곧 성불成佛
석가모니부처님은 깨쳤기 때문에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깨치신 과정은 어떠했을까요?
싯달타가 출가해서 맨 처음 수행했던 것은 그 당시에 최고의 수행으로 여겨지고 있던 명상이었습니다. 먼저 ‘알라라칼라마’라는 스승을 찾아가서 명상을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스승은 자기와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제안했지만, 그러한 경지에 만족할 수 없었던 싯달타는 그곳을 떠나 ‘우다카라마푸타’라는 스승에게로 가서 계속 명상을 배웠습니다. 이번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우다카라마푸타도 자기와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제안했지만, 싯달타는 명상을 버리고 떠납니다.
수행자 싯달타가 추구했던 것은 오직 생사해탈(生死解脫)이었을 뿐, 교단의 지도자가 되는 것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명상을 통해 매우 높은 경지에 다다랐지만, 명상으로는 결코 열반(涅槃)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명상에 잠겨있을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명상을 하지 않을 때엔 고요한 마음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싯달타는 미련 없이 명상수행을 버리고, 그 다음엔 고행(苦行)을 합니다.
수행자 싯달타는 과거에도 그렇게 고행한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영원히 나오지 않을 만큼 열심히 고행했습니다. 육체 때문에 정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았기에, 육체를 억압하면 정신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정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을 해보니 정신이 해방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라는 집착심이 점점 더 커지고 괴로움은 더해갔습니다. 명상과 마찬가지로 고행으로도 생사(生死)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 싯달타는 명상을 버렸던 것처럼 고행도 버립니다.
이때에 오랜 고행으로 지쳐 있던 싯달타에게 수자타라는 아가씨가 우유죽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싯달타는 이 우유죽을 마시고 몸과 정신을 추스르고 기력을 회복하여 보리수 아래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 생각합니다.
싯달타의 생명력을 소생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우유죽입니다. 그러면 우유죽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소에게서 나왔습니다. 소는 어떻게 우유를 만들었습니까? 풀을 뜯어 먹고 우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풀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풀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자라납니다. 또한 풀이 자라기 위해서는 태양과 적당한 물, 온도, 바람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우주 만물의 공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로부터 무한히 공급받아서 살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싯달타는 내가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내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우주의 절대적인 생명력에 의해 살려지고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즉 싯달타가 우유죽을 받아먹고 기력을 회복했다는 것은 자기를 무한히 살려주는 온 우주의 힘에 자기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리수 밑에 앉은 싯달타가 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완전한 항복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나’를 포기하고 보리수 아래에 앉은 싯달타에게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절대무한의 부처생명 앞에 ‘나’라는 개별생명은 따로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유한의 ‘나’를 포기할 때, 그 자리가 그대로 절대무한의 부처생명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석가 족(族)에 태어난 성자(聖者)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석가 족으로 태어난 육신을 갖고 계셨기에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석가 족에 태어난 싯달타가 부처님이 되었다고 해서, 그 육신이 보통 사람들의 육신과 달라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되었다는 것은 그 생명내용이 부처생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의 육신생명이 내 생명의 전부인 줄 알았다가, 절대무한의 부처생명이 나의 참생명임을 깨쳤다는 것입니다. 절대무한(絶對無限) 그 자체를 가리키는 ‘아미타’가 부처님의 참다운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육신이 없어진 이후에는 육신에 붙여진 이름 대신 부처생명 그 자체를 가리키는 아미타부처님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수행자 싯달타가 아미타생명의 부처님이 되었다는 것은 부처님과 내가 본래 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래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의 착각으로 말미암아 중생이라고 우기며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깨치고 보니 나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부처생명이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부처생명이 본래부터 너희의 참생명임을 바로 알고 부처생명으로 돌아오너라.”
하고 끊임없이 일러주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중생노릇 그만하고 부처생명, 즉 아미타생명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주시는 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또한, 이러한 부처님의 부르심에
“예, 알았습니다. 참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소리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로 불러주시는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원력(慈悲願力)입니다. 자비원력은 생명의지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원력(願力), 근본원력(根本願力)이라고 하는 말들이 바로 부처님의 이러한 생명의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도 부처님 근본원력의 작용으로 우리가 법회도 열고, 법문도 듣고, 나무아미타불도 부르는 것입니다. 결코 내가 잘나서, 내 능력이 뛰어나서 정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부처님의 원력에 나를 맡기는 것이며, 나를 항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항복하는 것은 진리가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깨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사람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부처님 원력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염불하는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는 것도 부처님 원력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깨치는 것은 다르지 않으며, 염불과 참선이 다르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불하기 전 보리수 아래에 앉으셨던 그 정신을 그대로 살리는 것입니다.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보다 더 쉽고 확실하게 성불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염불행자들은 항상 입에서 염불이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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