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참 많은 사람들이 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진실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은 부조리하다고 보고 있는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듣고 내 삶을 바꾸어 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의 종교라고 합니다. 즉,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라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되기 위해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부처님이 되는데 특별한 면허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생이지만 앞으로 열심히 수행해서 꼭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깨쳐서 부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말뜻을 잘 새겨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있었으면서도 모르고 지내다가 알아차린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즉, 깨쳐서 부처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중생이라고 우겼다가 법문을 듣고 본래 부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기에 믿음을 일으켜 부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깨치기 전부터 본래 부처
이렇게 깨달음이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알아차린 것이라면, 깨치기 전부터 이미 부처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비유하면 홈런을 친 타자와 같습니다. 1․2․3루타를 친 선수는 재빨리 뛰어야 하지만, 홈런을 친 선수는 구태여 빠르게 뛸 필요가 없습니다. 홈런을 쳤다는 것은 이미 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인 내가 열심히 수행해서 부처가 된다고 한다면, 부처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수행만 해야 할 것입니다. 1루를 친 선수가 열심히 달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인 내가 부처가 된다는 것은 말조차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에 이미 부처이셨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성불하기 위해서 따로 수행할 필요없이 본래부터 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부처 노릇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상(相)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착각이 일어나고, 몸뚱이를 나로 착각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중생이라고 우긴다고 해도, 나는 이미 부처생명입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아무리 중생이라고 우겨도, 혹은 아무리 중생처럼 보여도 진실은 ‘부처님 생명’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일체 모든 상을 여읨을 모든 부처님이라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이 부처님이라고 하면 특별한 능력을 행사해서 요술을 부리는 인물로 생각합니다만,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일체 모든 상을 여의면 부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상은 어떻게 여읠 수 있을까요? 상이 있는데 상을 여읠 수 있나요?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또 다시 ‘무릇 있는 바 상은 다 허망하니’라고 법문을 주십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본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거나 말거나’라는 의미입니다. 상이 없으면 좋지만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습니다.
안개 낀 날의 운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안개가 끼면 맑은 날보다는 운전하기가 힘이 듭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힘은 들지만 있고 없고에 지장 받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중생으로 보이는 것도, 그렇게 보이고 안 보이고에 관계없이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새삼스럽게 부처 되겠다는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입니다. 자꾸 깨쳐야 한다고 하니 오히려 문제가 발생합니다. 깨쳐야 한다는 밑바탕에는 ‘나는 깨치지 못했다’고 우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불교는 신앙이고 믿음이다
불교는 철학이나 학문이 아닙니다.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님을 믿는 것이고, 부처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불교는 새삼스럽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임을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과 나 사이의 울타리가 없어지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남이 아니라고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사람의 모든 고통과 슬픔이 내 슬픔이고 내 어려움입니다.
보현행원품에 적극적인 실천 법문이 많이 나옵니다. 즉, 보현행원품 법문은 적극적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지, 깨치고 난 후에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공부했듯이 깨달음이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부처 노릇하면 그만입니다.
병이 나아야겠다고 기도한다는 것은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보통 부자로 살고 싶다고 하면서 ‘부자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찬찬히 분석해보면, 이렇게 하는 기도야말로 가난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 되게 해달라는 말의 밑바탕에는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매일 매일 ‘나는 가난합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결과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쪽으로 나타납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지금 부자’라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다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항상 쪼들리며 살지만, 부자는 가진 것이 넉넉하니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구별됩니다.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나는 가난뱅이․거지임을 강조하는 것이며,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가난해집니다. 반대로 넉넉한 사람은 주려고 합니다. 심심치 않게 접하는 뉴스가 재벌가의 재산 다툼 소식입니다. 아무리 재벌이라고 하더라도 나누어 줄줄 모르고 움켜쥐려고만 하면, 끝내는 가난한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물은 자꾸 퍼주어도 끝없이 솟아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공급됨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줍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고 남에게 주는 것은 아깝고, 어떻게 해서라도 더 받아야겠다고 하는 것은 생명의 진실을 모르면서 거꾸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의 인생이란 항상 남에게 이로움을 주면서 사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고, 상에 집착해서 잘못된 인생관으로 괴롭게 사는 사람에게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법문을 전해줘서 바른 법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입니다.
불자(佛子)는 기복신앙이나 운명론에 지배받아서 살 수 없습니다.
깨달았거나 아니거나에 상관없이 이미 나의 참생명은 부처님생명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용기와 지혜가 넘쳐나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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