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無盡藏으로 산다
항상(恒常)하는 몸을 갖는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을 뿐더러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몸으로서의 나는 끝내 죽을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태어날 때 보송보송하던 피부는 어느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거칠어지지만, 이는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몇 십 년 잘 썼으면 노화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몸이 반드시 허물어지게 된다는 것은 좋고 나쁨의 상대적인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무상(無常)이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며, 세상살이를 지배하는 변화의 법칙에 의해서 벌어지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고 나면 모든 게 끝이라는 막된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몸으로서 살던 나는 죽겠지만, 그것으로 끝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죽기는 죽되, 몸으로 죽는 것이 참생명의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마주해야 합니다.
누군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가 없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가치기준에 맞추어 좋고 나쁨을 논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한정을 하고서는 삶의 진실과 마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단멸상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한된 범주 속에 갇혀 사는데 익숙합니다. 스스로 뭔가 굳어져 있는 단멸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곤에 찌들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멸상의 노예로 머무는 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 연극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잔치를 치루면서도 친지간의 만남을 기뻐할 새도 없이 동참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에 급급합니다. 하객의 숫자를 헤아리고, 부조금의 액수를 가늠하기에 바쁩니다. “남들이 나를, 그리고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볼까?”하면서 눈동자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렇게 남들의 눈치를 밤낮으로 의식하며 지내는데, 그들은 막상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버거워하고 있기에 진정한 관심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비난받거나 부러워하리라는 지레 짐작으로 당사자 혼자 초조해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생명의 내용은 누구에게 평가(評價)받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우리는 부처님생명으로 살다가 부처님생명으로 복귀(復歸)하는 게 인생의 진실인 것입니다.
물론 살아가는 과정에서 온갖 역할을 감당합니다. 아들 노릇을 하던 사람이 자신의 아들에게는 아버지로 불립니다. 길을 걷는 행인이던 사람이 잠시 후에는 차를 모는 운전수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삶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어쩌면 그렇게 태연스레 살아가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따로따로 나뉘는 노릇을 잘도 합니다.
왜냐하면 드러난 현상 그 자체는 우리의 참생명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경전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여래(如來)로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래로서의 부처님은 너무나 확실하게 출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내 앞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의 참생명을 알아채면 됩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 不依人]”고 하시는 말씀은 이를 새삼 일깨우는 경책입니다. 몸으로서의 사람에게 예배하지 말고, 그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에게 예배를 올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몸뚱이로서 대하는가, 아니면 여래로 모시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몸이라는 것은 이렇게 여래로서 오신 부처님생명이 실현하는 생명가치를 표현하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딸 노릇을 하던 여자가 한 남자의 부인 노릇을 하면서 또 누군가의 엄마 노릇을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바꾸어가지만 부처님생명은 항상 역연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결과는 결코 고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택한 인연만큼 살다가 때가 되면 또 다른 인연을 지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집에 있는 TV가 망가졌을 때 방송(放送)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만, TV가 망가졌다고 해서 방송국의 방송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습니다. 몸뚱이가 죽는다고 내 참생명의 가치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한정적인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진장(無盡藏)한 것이 우리의 생명가치입니다.
우린 실제로 무진장으로 왔습니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고 하는 것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무진장으로 살려고 빈손으로 온 것입니다. 누가 나를 적당히 살라고 제한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무진장으로 살려고 태어났다가 다시 무진장의 세계로 가는 것이 우리의 본래 인생입니다.
그러나 올 때는 분명 무진장으로 왔는데도, 언제부터인가 착각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해.”
“나는 왜 남들처럼 머리가 좋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사주팔자를 탓하거나 부모를 원망하거나 사회를 욕하면서 스스로를 제한(制限)시키는 못된 버릇이 몸에 배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못난 인생을 사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생명이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부터 무진장(無盡藏)입니다. 태어날 때 무진장으로 받았으니 무진장으로 쓰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얼마만큼 쓰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누가 따로 평가할 상대적(相對的)인 가치(價値)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생명의 법칙이 그러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오직 베풂만이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한테 등록금을 대주면서 차용증을 받습니까? 기저귀를 몇 번 갈아주었는지를 세었다가 훗날 자식에게 증거로 들이미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이 무진장으로 받았기 때문에 무진장으로 주고 있는 그 과정이 기쁜 것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부족(不足)을 준 적이 없습니다. 상대비교(相對比較)에 따른 아픔과 질시를 준적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무진장으로 살라고 여전히 베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대명천지(大明天地)가 눈앞에 전개됩니다. 산과 들의 맑은 공기는 우리에게 마셔달라고 밀려옵니다. 빛나는 태양은 밝은 빛을 마음껏 가지라고 머리 위를 맴돕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는 더러움을 씻어내고 목마름을 축이라고 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진장의 주인공이면서도 스스로를 믿지 못해 고민하고 걱정만 하느라 막상 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삶이란 무진장으로 태어나서, 무진장으로 살다가, 무진장으로 주고서, 무진장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지금입니다. 다음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영광도 아닙니다. 지금 무진장으로 살면 그만입니다.
이제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법우의 선택만 남았을 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순천만의 낙조
한해 잘 마무리하시길~....나무아미타불~!
항상(恒常)하는 몸을 갖는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을 뿐더러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몸으로서의 나는 끝내 죽을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태어날 때 보송보송하던 피부는 어느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거칠어지지만, 이는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몇 십 년 잘 썼으면 노화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몸이 반드시 허물어지게 된다는 것은 좋고 나쁨의 상대적인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무상(無常)이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며, 세상살이를 지배하는 변화의 법칙에 의해서 벌어지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고 나면 모든 게 끝이라는 막된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몸으로서 살던 나는 죽겠지만, 그것으로 끝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죽기는 죽되, 몸으로 죽는 것이 참생명의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마주해야 합니다.
누군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가 없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가치기준에 맞추어 좋고 나쁨을 논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한정을 하고서는 삶의 진실과 마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단멸상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한된 범주 속에 갇혀 사는데 익숙합니다. 스스로 뭔가 굳어져 있는 단멸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곤에 찌들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멸상의 노예로 머무는 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 연극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잔치를 치루면서도 친지간의 만남을 기뻐할 새도 없이 동참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에 급급합니다. 하객의 숫자를 헤아리고, 부조금의 액수를 가늠하기에 바쁩니다. “남들이 나를, 그리고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볼까?”하면서 눈동자를 굴리기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렇게 남들의 눈치를 밤낮으로 의식하며 지내는데, 그들은 막상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버거워하고 있기에 진정한 관심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비난받거나 부러워하리라는 지레 짐작으로 당사자 혼자 초조해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생명의 내용은 누구에게 평가(評價)받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우리는 부처님생명으로 살다가 부처님생명으로 복귀(復歸)하는 게 인생의 진실인 것입니다.
물론 살아가는 과정에서 온갖 역할을 감당합니다. 아들 노릇을 하던 사람이 자신의 아들에게는 아버지로 불립니다. 길을 걷는 행인이던 사람이 잠시 후에는 차를 모는 운전수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삶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어쩌면 그렇게 태연스레 살아가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따로따로 나뉘는 노릇을 잘도 합니다.
왜냐하면 드러난 현상 그 자체는 우리의 참생명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경전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여래(如來)로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래로서의 부처님은 너무나 확실하게 출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내 앞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의 참생명을 알아채면 됩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 不依人]”고 하시는 말씀은 이를 새삼 일깨우는 경책입니다. 몸으로서의 사람에게 예배하지 말고, 그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에게 예배를 올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몸뚱이로서 대하는가, 아니면 여래로 모시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몸이라는 것은 이렇게 여래로서 오신 부처님생명이 실현하는 생명가치를 표현하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딸 노릇을 하던 여자가 한 남자의 부인 노릇을 하면서 또 누군가의 엄마 노릇을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바꾸어가지만 부처님생명은 항상 역연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결과는 결코 고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택한 인연만큼 살다가 때가 되면 또 다른 인연을 지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집에 있는 TV가 망가졌을 때 방송(放送)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만, TV가 망가졌다고 해서 방송국의 방송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습니다. 몸뚱이가 죽는다고 내 참생명의 가치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한정적인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진장(無盡藏)한 것이 우리의 생명가치입니다.
우린 실제로 무진장으로 왔습니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고 하는 것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무진장으로 살려고 빈손으로 온 것입니다. 누가 나를 적당히 살라고 제한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무진장으로 살려고 태어났다가 다시 무진장의 세계로 가는 것이 우리의 본래 인생입니다.
그러나 올 때는 분명 무진장으로 왔는데도, 언제부터인가 착각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해.”
“나는 왜 남들처럼 머리가 좋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사주팔자를 탓하거나 부모를 원망하거나 사회를 욕하면서 스스로를 제한(制限)시키는 못된 버릇이 몸에 배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못난 인생을 사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생명이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부터 무진장(無盡藏)입니다. 태어날 때 무진장으로 받았으니 무진장으로 쓰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얼마만큼 쓰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누가 따로 평가할 상대적(相對的)인 가치(價値)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생명의 법칙이 그러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오직 베풂만이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한테 등록금을 대주면서 차용증을 받습니까? 기저귀를 몇 번 갈아주었는지를 세었다가 훗날 자식에게 증거로 들이미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이 무진장으로 받았기 때문에 무진장으로 주고 있는 그 과정이 기쁜 것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부족(不足)을 준 적이 없습니다. 상대비교(相對比較)에 따른 아픔과 질시를 준적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무진장으로 살라고 여전히 베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대명천지(大明天地)가 눈앞에 전개됩니다. 산과 들의 맑은 공기는 우리에게 마셔달라고 밀려옵니다. 빛나는 태양은 밝은 빛을 마음껏 가지라고 머리 위를 맴돕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는 더러움을 씻어내고 목마름을 축이라고 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진장의 주인공이면서도 스스로를 믿지 못해 고민하고 걱정만 하느라 막상 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삶이란 무진장으로 태어나서, 무진장으로 살다가, 무진장으로 주고서, 무진장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지금입니다. 다음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영광도 아닙니다. 지금 무진장으로 살면 그만입니다.
이제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법우의 선택만 남았을 뿐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순천만의 낙조
한해 잘 마무리하시길~....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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