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란 무엇인가?
오늘은 ‘부지런히 기도합시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실 기도(祈禱)라는 것이 불교에 맞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시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말 자체보다도 기도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불교에 맞는지 여부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참선하면서 가부좌하고 앉아있는 자체만 가지고 불교적인가 아닌가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공부하는 근본 자세가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그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구하면 주실 것이라는 기복(祈福)적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불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염불(念佛)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들어있지 않으면 기복신앙이 되어 문제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염불이 좋은가, 기도 또는 독경이 좋은가, 참선이 좋은가와 같이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좋고 나쁨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가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宗敎)란 생명의 가장 중심이 되는 근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영원절대를 의미합니다. 영원절대를 보장하는 것이 종교인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요술을 부려서 세상살이를 편리하게 해주는 정도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를 잘 믿으면 생존경쟁에 있어 신(神)이 내 편을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살이를 기준으로 해서 ‘종교를 믿으니 든든하다’라고 하는 것은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기 전에 ‘왜 믿는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부터 바로서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종교를 믿는 의미는 기복 신앙이 아닌, 상대유한의 괴로움을 여의고 절대무한의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 목적입니다. 상대유한의 괴로움, 즉 남과 대립하는 삶을 살고 유한적인 몸뚱이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오로지 즐거움만이 있는 절대무한을 실현시켜야겠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적입니다.
절대무한의 실현을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부처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며, 부처님의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성불, 열반, 극락이라는 말은 같은 것입니다.
금강경 제3분에서는 열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降伏)받으라.”
이 부분은 수 십 번 공부해도 모자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보살은 상대유한을 떠나서 절대무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킨 사람을 이릅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상대유한을 살며, 생사윤회 속에 괴로움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를 일러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자신이 지은 업(業)에 매여서 삽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습니다.
최면상태에서 현재의식이 잠들면 잠재의식과 무의식이 남는데 거기에 지시를 내리는 것을 암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중생생명을 살고 있는 이유는 업연(業緣)이나 암시(暗示)에 매여서 자유가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자유 없이 사는 것은 즐거움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겠다고 하는 마음은 보살(菩薩)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보살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보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원을 성취하고자 빌 때는 항복의 마음이 아니라 ‘내 고집을 만족시켜 주십시오’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마음이든지 모두 항복 받으라고 하십니다.
항복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졌던 가치관, 인생관을 항복 받는 것이고, 또 하나 근본적인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중생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을 항복 받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은 내 밖에 남이 있어서 그들이 좀 불행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이 ‘나만 잘 살고 편하면 그만이다’라고 했었는데, 이제부터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원절대의 행복을 누리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처되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보살의 삶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한량없는 세월동안 보살 노릇하다가 공부가 완성되신 분입니다. 따라서 부처를 이루기 위해 마음공부에 정진하고 있는 분은 보살입니다. 보살을 겪지 않고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염의삭발하면 별안간 위대한 사람으로 행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의삭발을 하더라도 보살의 마음이 없으면 훌륭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머리 길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보살의 마음이 있다면, 그분은 부처될 사람이므로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모두 무여열반, 절대무한에서 살게 하겠다는 부처님의 원(願)이 완벽하게 성취(成就)된 것이 바로 성불(成佛)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우리는 이미 부처입니다. 새삼스럽게 앞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한능력자입니다.
실제로는 아무런 장애나 대립이 없고 구속도 없고 어둠, 다툼, 원망, 미움도 없는데, 우리가 살면서 힘들고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나를 구속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나무(南無)!’로 그 마음을 항복 받고 보니, 본래 나의 참생명은 영원절대인 ‘아미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불자들이 무명(無明)으로 괴로움 속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광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한 촉광이 빛나고 있는 현실에 눈을 감고 부처님의 대자대비 원력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법문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해야 합니다. 또한 나무아미타불을 부지런히 불러야 합니다. 전식득지(轉識得智)라는 말처럼 상대세계의 마음 작용을 물리치고 지혜로 바꿔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생명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용이 바뀌고 보니 남이 없고 이 세상 모두가 부처임을 알게 됩니다. 내 밖에 원수가 있다고 보지 않는 것, 내가 이미 부처님의 대비원력에 의해서 본래 부처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버리는 것, 그것이 항복입니다.
불교는 정진(精進)의 종교입니다. 문사수(聞思修)의 수(修)도 수행(修行)을 이릅니다. 아침에 일어나 30분이나 1시간이라도 염불을 하면, 그러는 가운데 ‘내가 말할 수 없는 축복 속에 있구나, 일체 모든 장애나 어둠, 다툼이 없구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디에 있거나 웃는 얼굴이 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게 되는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부지런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기도를 하면 여러분의 얼굴도 마음도 건강상태도 모두 바뀌게 됩니다. 일체 모든 불가능이 없음을 되뇌면 본래 무한능력의 광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떤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축원의 말을 내가 듣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나를 일깨워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병이 생기거나 어두운 일이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부지런히 기도합시다.
밖을 향해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중생심을 항복 받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공부가 기도이며 절대긍정입니다. 절대긍정하는 사람은 평상시에 부정적인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칭찬과 감사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2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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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5그날도 출근준비를 하며 금강경에 대한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금강경 어디쯤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틀어만 놓았지 귀담아 듣지
못한 탓입니다.
그때 금강경을 설하는 법사님이 마침 기도라는 말씀을 하고
계셨나 봅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순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기도에 대한 절차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아하 기독교에서는 '죄 많은 나(업식으로 덮힌 나)'로는
기도성취가 안 되는 것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간매개체를 세웠구나.
그래서 나를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것이고 그래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이구나..
나를 순간찰라라도 잊어야 하는 것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我空'
그들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야말로 법계연기를 말하는 것이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오랫동안 갖고 있던 '그들의 기도방식'을
제식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 날부터 저도 기도할 줄 알게되었습니다.
이 기도야말로 能禮所禮가 眞性緣起하는 祈禱의 法則이라는 것을..
지산
2010.12.27'그 마음을 항복 받으라'라는 문구는 스님과 법사님의 법문을 수 없이 반복하여 들어도 수시로 머리속이 텅비고 깜박 깜박하는 경전 문구입니다.
다시 한 번 문사수 법요집을 펼치고 살펴봅니다.
과거 셀 수 없는 찰나 동안의 사소한 세상사의 물결속에 윤회하며 쌓은 원망과 증오와 악업의 열매인 괴로움 달게 받으면서 그 원망을 갚겠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실체가 없는 바 얻고 잃음이 인연에 따라 드러나고 다하면 없어질 운명, 마음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억지로 함이 없이 나를 내려놓고 나에게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움이고 구하는 것이 없으면 즐거움이란 경구를 되새기며, 너란 너의 이름으로 다가온 또다른 나임을 잊지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욕망을 원력으로 변화시키는 자리이타적 존재로 노력하고 욕망을 탐욕으로 향유하는 이기배타적인 소유자에 머무르지 않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