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입니다.
저는 지방(紙榜)을 쓸 때마다 예전에 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쓰는 법을 가르쳐주시면서, ‘이 녀석아, 나중에 내 이름 잘 써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때 할아버님께, ‘그럼 저도 언젠가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같이 앉게 되겠네요?’ 하자,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까지 함께 겹치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차례(茶禮)를 통한 만남은 단순한 의례가 아닙니다. 조상님네로 대표되는 수많은 생명에 대한 감사의 순간이기에 말입니다.
흔히들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으로 조상님네를 모시는 듯 한데,
『알고 보니 당신네들이 주신 생명 덕분에 살고 있고, 수평적으로도 수많은 이웃들과 직장동료들 그리고 가족들의 도움 속에서 제가 살고 있습니다』
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 차례를 모시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새삼 차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생명(生命)에 대한 무감동(無感動)으로 길들여진 우리의 인식에 분명한 확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에서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이고 증조(曾祖)이시지, 당사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분 또한 아들이었고, 직장인이었으며, 이웃과 부대끼며 울고 웃던 사회인이기도 했던 분입니다.
이는 곧 그 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한히 얽혀있는 생명 관계의 연속성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면 단락된 것, 고립된 것으로 또는 개별화된 생명으로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무한히 얽히고설켜서, 딱 부러지게
『이것만이 내 생명이다!』
라고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인드라망[因陀羅網, Indra-net]이라고 합니다.
인도에는 인드라[帝釋]라고 하는 전설적인 신(神)이 있습니다. 인드라라고 하는 신은 항상 그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모든 생명에게 그물을 던져서 구제를 하는데,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생명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드라신의 임무는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자기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고 자각하는 사람에게 무한능력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이 인드라망으로 무한히 얽혀 있는 세계에 대해서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살들이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무한하게 변화하는 몸을 나타낼 적에
그 몸을 권속들로 장엄하거나 동무가 없는 단독의 몸이기도 하며
승려의 몸도 되고, 바라문의 몸도 되고, 집을 떠난 외도의 몸도 되고,
고행하는 몸도 되고, 충실한 몸도 되고, 의사의 몸도 되고, 장사꾼의 몸도 되고,
기생의 몸도 되고, 광대의 몸도 되고, 비사문천왕의 몸도 되고,
세간 임금의 몸도 되고, 하늘을 섬기는 몸도 되고, 유능한 기술자의 몸도 된다.
그래서 이렇게 변화하는 몸으로 중생들이 있는 곳에 가며
마땅히 환술 같은 지혜를 일으켜서 모든 세상에서 제석천왕의 진주그물 같은 보살의 행을 베푸는 것이다.
보살이란 자기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끝없이 증명하고 있을 때를 이르는 이름입니다.
많은 친구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홀로 고독을 씹으면서 아파트에서 자폐증(自閉症) 환자처럼 혼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직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사기를 치면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떨 때는 건강한 몸을 갖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약골이 되어서 병원을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당신과 나는 인간의 온갖 다양한 모습들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쪽 면만 보는데 길들여져서 너무나 자주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어버립니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존재인데도 고정된 실체로 보려고 하는 유혹에 빠져듭니다.
이로 말미암은 시비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낳아서 키우고 있는 자녀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인정한 아들밖에 모르고 있다는 것이 진실 아니겠습니까?
남편과 한평생을 같이 한 아내가 죽을 때까지 남편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정직한 우리 인생의 실상일 것입니다.
다시 인드라망 얘기로 돌아갑시다.
얽히고설킨 그물의 한 코를 잡아당기면 옆에 이어진 네 군데의 코가 따라오고, 또 4개의 코마다 또 이어진 코가 줄줄이 모두 다 따라 올라옵니다. 코 하나를 잡아당기는데 전혀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엉뚱한 그물코까지 모두 다 따라옵니다.
얽히고설켜 있는 세상이기에 나와 연관되지 않은 무가치한 생명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너무나 평범한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특정인의 삶이 놀랍고, 아주 잘된 그 사람이 부럽습니다.
그럼 그 입장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인기 연예인이나 잘나간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잠이나 실컷 잤으면 원이 없겠다.』
한결같은 말인데, 누가 쉬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냥 가서 자거나 사라지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냐고 물으면,
『어휴~ , 먹고사는 게 뭔지..』
말은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어떤 특정의 삶만이 내 삶이라고 설정을 하고는, 거기다 목을 매는 모습은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문학적인 교육을 꼭 받아야만 문학가가 되는 게 아니라, 있는 대로의 진솔한 삶을 담은 글보다 더 좋은 글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왜 내 안에 있는 천재적인 문장력을 죽이고 있는지 돌이켜볼 일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유명한 문인들을 우습게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미처 발휘하지 않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인드라망과 같이 내 눈에 띄거나 띄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내가 믿거나 말거나 간에 아무튼 우리는 모든 생명과 얽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로 맺어져 있는 입장, 이를 불가에서는 총상(總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 점검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특정의 면만이 더 뛰어나다든가, 어떤 특정의 사람만이 존중받아야 된다는 사고방식은 과연 정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어느 부분이 제일 소중하게 여겨집니까?
당장 생각하기에 거실이나 안방, 아니면 귀중품을 숨겨둔 곳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둥 없는 집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붕이나 대들보 없는 집 또한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바닥재 없는 집은 또 어떻고요? 그리고 볼 일이 급할 땐 화장실보다 더 소중한 곳이 없습니다.
집이란 지붕과 대들보 그리고 기둥이나 바닥재 등 모든 구조물들이 균형 있게 모여서 이루어졌을 때를 가리킵니다. 아랫목이 따뜻한 안방만을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까짓 것 기둥 하나 없다고 뭐 ...’ 하면서 기둥 알기를 우습게 아는 분이 있습니다. 기둥이 없으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텐데도 말입니다.
결국 특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서로를 의지해 가면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기둥은 기둥대로 잘났고, 대들보는 대들보대로 잘났지만, 기둥과 대들보가 만나야 집이 됩니다.
이러한 무한한 연결고리 가운데서 사는 것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본분(本分)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참으로 잘 지키면서도 모든 생명을 향해서,
『내가 이 생명의 흐름 따라서 살려지고 있구나. 나 또한 그 생명을 만난 인연 속에서 베풀어서 살려야겠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우리 삶의 끝없이 흘러가는 운동력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표출되는 표현들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말일 수도 있고, 손짓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발길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침묵(沈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일러 법문(法門)이라고 합니다.
법문이란 법사가 마이크 앞에서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의 흐름이 되어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저는 지방(紙榜)을 쓸 때마다 예전에 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쓰는 법을 가르쳐주시면서, ‘이 녀석아, 나중에 내 이름 잘 써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때 할아버님께, ‘그럼 저도 언젠가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같이 앉게 되겠네요?’ 하자,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까지 함께 겹치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차례(茶禮)를 통한 만남은 단순한 의례가 아닙니다. 조상님네로 대표되는 수많은 생명에 대한 감사의 순간이기에 말입니다.
흔히들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으로 조상님네를 모시는 듯 한데,
『알고 보니 당신네들이 주신 생명 덕분에 살고 있고, 수평적으로도 수많은 이웃들과 직장동료들 그리고 가족들의 도움 속에서 제가 살고 있습니다』
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 차례를 모시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새삼 차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생명(生命)에 대한 무감동(無感動)으로 길들여진 우리의 인식에 분명한 확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에서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이고 증조(曾祖)이시지, 당사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분 또한 아들이었고, 직장인이었으며, 이웃과 부대끼며 울고 웃던 사회인이기도 했던 분입니다.
이는 곧 그 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한히 얽혀있는 생명 관계의 연속성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면 단락된 것, 고립된 것으로 또는 개별화된 생명으로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무한히 얽히고설켜서, 딱 부러지게
『이것만이 내 생명이다!』
라고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인드라망[因陀羅網, Indra-net]이라고 합니다.
인도에는 인드라[帝釋]라고 하는 전설적인 신(神)이 있습니다. 인드라라고 하는 신은 항상 그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모든 생명에게 그물을 던져서 구제를 하는데,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생명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드라신의 임무는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자기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고 자각하는 사람에게 무한능력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이 인드라망으로 무한히 얽혀 있는 세계에 대해서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살들이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무한하게 변화하는 몸을 나타낼 적에
그 몸을 권속들로 장엄하거나 동무가 없는 단독의 몸이기도 하며
승려의 몸도 되고, 바라문의 몸도 되고, 집을 떠난 외도의 몸도 되고,
고행하는 몸도 되고, 충실한 몸도 되고, 의사의 몸도 되고, 장사꾼의 몸도 되고,
기생의 몸도 되고, 광대의 몸도 되고, 비사문천왕의 몸도 되고,
세간 임금의 몸도 되고, 하늘을 섬기는 몸도 되고, 유능한 기술자의 몸도 된다.
그래서 이렇게 변화하는 몸으로 중생들이 있는 곳에 가며
마땅히 환술 같은 지혜를 일으켜서 모든 세상에서 제석천왕의 진주그물 같은 보살의 행을 베푸는 것이다.
보살이란 자기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끝없이 증명하고 있을 때를 이르는 이름입니다.
많은 친구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홀로 고독을 씹으면서 아파트에서 자폐증(自閉症) 환자처럼 혼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직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사기를 치면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떨 때는 건강한 몸을 갖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약골이 되어서 병원을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당신과 나는 인간의 온갖 다양한 모습들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쪽 면만 보는데 길들여져서 너무나 자주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어버립니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존재인데도 고정된 실체로 보려고 하는 유혹에 빠져듭니다.
이로 말미암은 시비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낳아서 키우고 있는 자녀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인정한 아들밖에 모르고 있다는 것이 진실 아니겠습니까?
남편과 한평생을 같이 한 아내가 죽을 때까지 남편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정직한 우리 인생의 실상일 것입니다.
다시 인드라망 얘기로 돌아갑시다.
얽히고설킨 그물의 한 코를 잡아당기면 옆에 이어진 네 군데의 코가 따라오고, 또 4개의 코마다 또 이어진 코가 줄줄이 모두 다 따라 올라옵니다. 코 하나를 잡아당기는데 전혀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엉뚱한 그물코까지 모두 다 따라옵니다.
얽히고설켜 있는 세상이기에 나와 연관되지 않은 무가치한 생명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너무나 평범한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특정인의 삶이 놀랍고, 아주 잘된 그 사람이 부럽습니다.
그럼 그 입장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인기 연예인이나 잘나간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잠이나 실컷 잤으면 원이 없겠다.』
한결같은 말인데, 누가 쉬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냥 가서 자거나 사라지면 되는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냐고 물으면,
『어휴~ , 먹고사는 게 뭔지..』
말은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어떤 특정의 삶만이 내 삶이라고 설정을 하고는, 거기다 목을 매는 모습은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문학적인 교육을 꼭 받아야만 문학가가 되는 게 아니라, 있는 대로의 진솔한 삶을 담은 글보다 더 좋은 글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왜 내 안에 있는 천재적인 문장력을 죽이고 있는지 돌이켜볼 일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유명한 문인들을 우습게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미처 발휘하지 않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인드라망과 같이 내 눈에 띄거나 띄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내가 믿거나 말거나 간에 아무튼 우리는 모든 생명과 얽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로 맺어져 있는 입장, 이를 불가에서는 총상(總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 점검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특정의 면만이 더 뛰어나다든가, 어떤 특정의 사람만이 존중받아야 된다는 사고방식은 과연 정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어느 부분이 제일 소중하게 여겨집니까?
당장 생각하기에 거실이나 안방, 아니면 귀중품을 숨겨둔 곳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둥 없는 집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붕이나 대들보 없는 집 또한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바닥재 없는 집은 또 어떻고요? 그리고 볼 일이 급할 땐 화장실보다 더 소중한 곳이 없습니다.
집이란 지붕과 대들보 그리고 기둥이나 바닥재 등 모든 구조물들이 균형 있게 모여서 이루어졌을 때를 가리킵니다. 아랫목이 따뜻한 안방만을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까짓 것 기둥 하나 없다고 뭐 ...’ 하면서 기둥 알기를 우습게 아는 분이 있습니다. 기둥이 없으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텐데도 말입니다.
결국 특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서로를 의지해 가면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기둥은 기둥대로 잘났고, 대들보는 대들보대로 잘났지만, 기둥과 대들보가 만나야 집이 됩니다.
이러한 무한한 연결고리 가운데서 사는 것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본분(本分)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참으로 잘 지키면서도 모든 생명을 향해서,
『내가 이 생명의 흐름 따라서 살려지고 있구나. 나 또한 그 생명을 만난 인연 속에서 베풀어서 살려야겠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우리 삶의 끝없이 흘러가는 운동력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표출되는 표현들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말일 수도 있고, 손짓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발길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침묵(沈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일러 법문(法門)이라고 합니다.
법문이란 법사가 마이크 앞에서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의 흐름이 되어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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