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기도하지 맙시다
사실 온갖 만남의 속내는 항상 똑같습니다. 주인과 주인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이는 대립과 갈등의 시작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면 저쪽은 나와 동반자(同伴者) 관계가 됩니다. 동반자임과 동시에 각자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만남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주(主)라고 할 때 저쪽은 내 종노릇을 해주면 좋은데, 저쪽도 자신이 주라고 주장을 하는 게 세상살이이기도 합니다. 내가 주가 되어 살 때, 세상은 종(從)이 되어서 나한테 따라와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상대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내 생명의 반영을 저쪽에서 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을 보게 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싫어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절대로 그런 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와 그 친구 사이에 주파수의 동조(同調) 현상이 없다면, 내 앞에 그렇게 싫어하는 모습이 연출될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울을 볼 때, 『아니 이렇게 못생긴 사람이 있어? 나는 얼마나 잘생겼는데..』
하면서 거울을 보았다면, 거울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못생긴 나의 잘못입니까?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나 비치는 것이 세상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반영임과 동시에, 동반자적인 것이 내가 만나는 세상입니다.
다른 말로 하여 내 형제와 불화라면, 부부관계에서 무슨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 현상을 부여잡고 있는 내 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탓이다!』 하면서, 제가 파놓은 구멍에 갇혀서 자칫 우울증에 걸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반영으로서의 세계에서 나는 주인으로 살고 있기에, 인생은 남과 비교하려고 한다고 해서 비교되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은 모든 생명의 주권을 갖고 있는 주인들의 천국이기에,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십이면 어떻고, 육십 먹었으면 어떻습니까? 그 자체로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뿐인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조건임을 눈감고 따로 무엇과 비교하려고 합니까?
육십된 사람이 이팔청춘시절을 그리워 하다가, 불현듯이 『내가 십 년만 젊다면...』하는 아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십 년만 젊다면 하는 소리는 지금의 삶을 부정하겠다는 소리이고, 지금의 삶에 눈감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나이가 몇 살이든 최선의 조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생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그대로가 부처님생명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명이 간다고 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또 왔다고 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흔히들 짝사랑의 추억이라든가, 옛날 고향 언덕을 넘으며 맡았던 향긋한 들 향기를 생각하는 순간, 기분이 산뜻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떠나왔지만 떠나온 바가 없고, 만났기는 하되 만남이 없는 그런 만남을 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생명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히 살아있다고 얘기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살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확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것도 행복하게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진정한 삶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주인의 확고한 입장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 행동까지 더해져야 합니다.
얼핏 보기에 세상에는 대립으로 이어지는 삶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방해를 하고, 험담을 하고, 그래서 무척이나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그 삶의 본질적인 면을 수용하고, 내 속에서 소화를 해 가지고 구사하며, 온갖 것을 부처님생명으로 표(表)해 가는 것이 우리들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새삼 세상의 사는 모습들을 들여다보십시오.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일이나 어떤 걱정이 세상의 다인 것 같지만, 눈 한번 돌리면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이나 스물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여전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온갖 것들은 언제나 나를 향한 공급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변덕스런 마음은 바쁘기만 합니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기쁜 사건 슬픈 사건으로 나누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삶 전체를 대긍정(大肯定)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佛家)에서는 장엄 (莊嚴)이라고 합니다.
혹시 빛나고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장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장엄은 세상 만물이 두루 섞여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추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빼어난 것과 모자란 것이 모두 함께 어우러졌을 때를 일러 장엄이라고 합니다.
세상 여자들이 모두 다 미스코리아처럼 생겼다면 아마 지겨워서 못 볼 것입니다. 또 모든 남자가 미스터코리아처럼 근육질만 모였다면 그것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고, 갖가지 사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장엄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무한히 삶의 욕구와 더불어서 죽음에 대한 어떤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말은 안정(安定)이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활동을 이쯤에서 멈추고 싶다, 이만하면 내가 편안해지겠다.- 이것을 흔히 질서라고 얘기합니다. 우주론에서 하는 말로 코스모스라는 것이 질서입니다.
세상은 질서가 있어야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질서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함부로 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획일화 된 것을 질서라고 생각하는데, 진정한 질서란 무질서 즉 카오스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카오스란 혼돈이 일어나는 생명이 요동치는 자리입니다. 생명이 요동친다고 하는 그 질서가 우리생명의 본래 원리인 것입니다.
세상에 고정된 것이 있습니까?
오성과 한음이란 분에 얽힌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이 개구쟁이 오성과 한음의 장난이 지나치리만큼 짓궂고 개망나니처럼 험했기 때문에 당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잘되고 나니까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역시 뭔가 달랐던 분들이야』하고 칭찬을 합니다.
이런 결과론에서만 자꾸 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장엄되고 있는 인생은 과정(過程)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만으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정진(精進)의 힘이 아니면 안됩니다.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무한히 증명하는 나무아미타불 - 나는 중생생명이 아닙니다란 뜻의 「나무」와 무한생명, 무한광명 「아미타불」이 나의 참생명입니다 - 이라고 하는 확증, 이것을 계속하고 있을 때 꽃들이 장엄됩니다.
그럼 연꽃은 왜 불교의 상징입니까?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즉 『내 정진의 꽃이 핀다, 내 수행의 꽃이 핀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만큼 행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에 올거야」가 아닙니다. 이미 열매를 맺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열매를 세상이 이미 나에게 약속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고 받아서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환하게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에 걸쳐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자꾸만 특정의 꽃만을 찾고 있더라 하는 반성을 하는 동시에, 행복을 누릴 자격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법우님들!
없지만 내가 인정하면 있는 것입니다. 귀신도 인정하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업장(業障)이 두터워서 그렇다거나, 조상이 배가 고파하니 돈을 내라하는 식으로 갖가지 공포심(恐怖心)을 조장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마구니[魔軍]들로 우리 사회가 떠들썩한 것은, 자신의 삶으로 접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시사일 것입니다.
접수하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 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수평적으로 내가 사는 수많은 가족과 친구들, 은혜를 받은 선생님들과 옛날 동료들, 그 수많은 분들이 없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수직적으로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상들이 계시지 않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생명들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꼭 정진하면서 확인(確認)해야 합니다.
확인하고는 실천(實踐)해야 합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또 마음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을 자꾸 찬탄(讚嘆)해야 합니다.
「당신은 부처님생명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이와같이 칭찬(稱讚)을 많이 하고, 찬탄을 많이 하고, 감사(感謝)를 많이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사건이 있으면 할께요」 「찬탄할 일이 있으면 찬탄할께요」 또 「칭찬할 만하면 칭찬할께요」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일이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부처님.」 이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먼저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먼저 감사하고, 내가 먼저 찬탄하고, 내가 먼저 칭찬하면 찬탄과 칭찬과 감사의 일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석과 같아서 그런 마음이 있으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거꾸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사실 온갖 만남의 속내는 항상 똑같습니다. 주인과 주인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이는 대립과 갈등의 시작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면 저쪽은 나와 동반자(同伴者) 관계가 됩니다. 동반자임과 동시에 각자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만남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주(主)라고 할 때 저쪽은 내 종노릇을 해주면 좋은데, 저쪽도 자신이 주라고 주장을 하는 게 세상살이이기도 합니다. 내가 주가 되어 살 때, 세상은 종(從)이 되어서 나한테 따라와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상대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내 생명의 반영을 저쪽에서 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을 보게 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싫어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절대로 그런 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와 그 친구 사이에 주파수의 동조(同調) 현상이 없다면, 내 앞에 그렇게 싫어하는 모습이 연출될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울을 볼 때, 『아니 이렇게 못생긴 사람이 있어? 나는 얼마나 잘생겼는데..』
하면서 거울을 보았다면, 거울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못생긴 나의 잘못입니까?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나 비치는 것이 세상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반영임과 동시에, 동반자적인 것이 내가 만나는 세상입니다.
다른 말로 하여 내 형제와 불화라면, 부부관계에서 무슨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 현상을 부여잡고 있는 내 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탓이다!』 하면서, 제가 파놓은 구멍에 갇혀서 자칫 우울증에 걸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반영으로서의 세계에서 나는 주인으로 살고 있기에, 인생은 남과 비교하려고 한다고 해서 비교되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은 모든 생명의 주권을 갖고 있는 주인들의 천국이기에,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십이면 어떻고, 육십 먹었으면 어떻습니까? 그 자체로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뿐인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조건임을 눈감고 따로 무엇과 비교하려고 합니까?
육십된 사람이 이팔청춘시절을 그리워 하다가, 불현듯이 『내가 십 년만 젊다면...』하는 아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십 년만 젊다면 하는 소리는 지금의 삶을 부정하겠다는 소리이고, 지금의 삶에 눈감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나이가 몇 살이든 최선의 조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생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그대로가 부처님생명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명이 간다고 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또 왔다고 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흔히들 짝사랑의 추억이라든가, 옛날 고향 언덕을 넘으며 맡았던 향긋한 들 향기를 생각하는 순간, 기분이 산뜻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떠나왔지만 떠나온 바가 없고, 만났기는 하되 만남이 없는 그런 만남을 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생명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히 살아있다고 얘기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살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확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것도 행복하게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진정한 삶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주인의 확고한 입장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 행동까지 더해져야 합니다.
얼핏 보기에 세상에는 대립으로 이어지는 삶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방해를 하고, 험담을 하고, 그래서 무척이나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그 삶의 본질적인 면을 수용하고, 내 속에서 소화를 해 가지고 구사하며, 온갖 것을 부처님생명으로 표(表)해 가는 것이 우리들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새삼 세상의 사는 모습들을 들여다보십시오.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일이나 어떤 걱정이 세상의 다인 것 같지만, 눈 한번 돌리면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이나 스물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여전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온갖 것들은 언제나 나를 향한 공급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변덕스런 마음은 바쁘기만 합니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기쁜 사건 슬픈 사건으로 나누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삶 전체를 대긍정(大肯定)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佛家)에서는 장엄 (莊嚴)이라고 합니다.
혹시 빛나고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장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장엄은 세상 만물이 두루 섞여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추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빼어난 것과 모자란 것이 모두 함께 어우러졌을 때를 일러 장엄이라고 합니다.
세상 여자들이 모두 다 미스코리아처럼 생겼다면 아마 지겨워서 못 볼 것입니다. 또 모든 남자가 미스터코리아처럼 근육질만 모였다면 그것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고, 갖가지 사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장엄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무한히 삶의 욕구와 더불어서 죽음에 대한 어떤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말은 안정(安定)이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활동을 이쯤에서 멈추고 싶다, 이만하면 내가 편안해지겠다.- 이것을 흔히 질서라고 얘기합니다. 우주론에서 하는 말로 코스모스라는 것이 질서입니다.
세상은 질서가 있어야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질서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함부로 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획일화 된 것을 질서라고 생각하는데, 진정한 질서란 무질서 즉 카오스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카오스란 혼돈이 일어나는 생명이 요동치는 자리입니다. 생명이 요동친다고 하는 그 질서가 우리생명의 본래 원리인 것입니다.
세상에 고정된 것이 있습니까?
오성과 한음이란 분에 얽힌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이 개구쟁이 오성과 한음의 장난이 지나치리만큼 짓궂고 개망나니처럼 험했기 때문에 당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잘되고 나니까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역시 뭔가 달랐던 분들이야』하고 칭찬을 합니다.
이런 결과론에서만 자꾸 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장엄되고 있는 인생은 과정(過程)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만으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정진(精進)의 힘이 아니면 안됩니다.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무한히 증명하는 나무아미타불 - 나는 중생생명이 아닙니다란 뜻의 「나무」와 무한생명, 무한광명 「아미타불」이 나의 참생명입니다 - 이라고 하는 확증, 이것을 계속하고 있을 때 꽃들이 장엄됩니다.
그럼 연꽃은 왜 불교의 상징입니까?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즉 『내 정진의 꽃이 핀다, 내 수행의 꽃이 핀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만큼 행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에 올거야」가 아닙니다. 이미 열매를 맺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열매를 세상이 이미 나에게 약속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고 받아서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환하게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에 걸쳐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자꾸만 특정의 꽃만을 찾고 있더라 하는 반성을 하는 동시에, 행복을 누릴 자격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법우님들!
없지만 내가 인정하면 있는 것입니다. 귀신도 인정하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업장(業障)이 두터워서 그렇다거나, 조상이 배가 고파하니 돈을 내라하는 식으로 갖가지 공포심(恐怖心)을 조장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마구니[魔軍]들로 우리 사회가 떠들썩한 것은, 자신의 삶으로 접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시사일 것입니다.
접수하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 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수평적으로 내가 사는 수많은 가족과 친구들, 은혜를 받은 선생님들과 옛날 동료들, 그 수많은 분들이 없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수직적으로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상들이 계시지 않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생명들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꼭 정진하면서 확인(確認)해야 합니다.
확인하고는 실천(實踐)해야 합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또 마음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을 자꾸 찬탄(讚嘆)해야 합니다.
「당신은 부처님생명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이와같이 칭찬(稱讚)을 많이 하고, 찬탄을 많이 하고, 감사(感謝)를 많이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사건이 있으면 할께요」 「찬탄할 일이 있으면 찬탄할께요」 또 「칭찬할 만하면 칭찬할께요」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일이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부처님.」 이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먼저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먼저 감사하고, 내가 먼저 찬탄하고, 내가 먼저 칭찬하면 찬탄과 칭찬과 감사의 일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석과 같아서 그런 마음이 있으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거꾸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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