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조 도신대사 ( 四祖 道信大師 )
1) 도신대사 ( 道信大師 )
- 도신대사는 13세부터 삼조 승찬대사에게서 10년간 공부하고 법을 이었다.
이후 강서성 대림사(大林寺)에서 10년, 이후 쌍봉산에서 30년간 머물며 수행했다.
삼조까지는 떠돌면서 법을 전했지만 도신대사부터 한곳에 머물면서 도량을 짓고 농사와 같이한 선농일여(禪農一如) 사상으로 전통적인 계율을 넘어선 파격적인 것이었고 동아시아 선불교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 태종으로부터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를 받은 의왕(醫王)이기도 하다.
의약연구에도 힘써 승려들의 병을 직접 해결하기위해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으면서 ‘초목집성’이라는 책을 저술할정도로 의술이 뛰어났다. 특히 당태종이 병으로 위중할 때 전국에있는 최고의 처방을 요청하였으며, 이때 도신선사가 약방문을 보내 황제를 치료한 일로 유명하다.
2) 사조사
- 사조사는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 쌍봉산 자락에 우치하고 있으며, 사조사의 옛 이름은 정각선사(正覺禪寺)다. 당 무덕 7년(624) 도신(道信.580-651) 조사가 창건했고, 나라에서 정각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창건 당시 사조사는 800칸에 1000명의 수좌들이 수행하던 대찰이었다. 1400년 세월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조사전과 몇몇 석조물만 남았다. 근래 들어 천왕전, 대불전, 관음전, 지장전, 화엄전, 조당, 장경루, 종고루 등 30여개의 전각이 복원되었다.
조사전 안에는 각종 편액과 도신 스님의 상이 모셔져있다.
왼편 길로 올라가면 비로탑이 있는데 산중턱에 세워진 이 단층 정방형의 전탑은 당대(唐)의 것으로 높이 11미터, 기단 11미터로 탑사방에 연호형 문이나있다. 또한 이탑 안에는 신라 법랑스님 입상도 볼수 있다.
< 황매현 사조사 >
< 사조사 비로자나 탑 >
< 황매 핑무산 오조사 >
< 오조 홍인대사 진신상 >
< 소관 남화선사 내 무상송 비석)
< 광주 광효사, 육조스님의 축발탑 과 보리수 >
< 和諧號 - 시속35okm의 쾌속열차 >
5. 오조 홍인대사 ( 五祖 弘忍大師 )
1) 홍인대사 ( 弘忍大師 )
- 일곱 살에 출가하여 도신대사의 문하에서 기나긴 세월동안 수업을 쌓은뒤 도신대사가 입적한 후 5조는 쌍봉산의 동쪽인 빙무산(憑茂山)으로 옮긴다. 이후 사람들은 4조 도신이 주석한 쌍봉산을 서산(西山)이라 부르고 홍인이 주석한 핑무산을 동산(東山)이라 부르게 됐다.
이로부터 5조의 선을 동산법문이라고 부른다.
홍인의 모친은 처녀의 몸으로 홍인을 낳아 일곱 살이 될 때까지 훌륭하게 키워냈고 이후
4조 도신선사의 제자가 되어 30여년간 공부하여 법맥을 잇게 된것이다.
2) 오조사
- 호북성 황매현 쌍봉산의 동쪽인 빙무산(憑茂山)에 우뚝선 오조사는 ‘법만을 볼뿐 사람은 보지 않는다(법등명)’.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조 홍인대사의 구도로 실천되었던 행화도량이자, 그 홍인대사로부터 육조 혜능선사에게 달마선사로부터 이어진 법의 신표, 의발이 전해졌던 전법의 현장이다.
오조대사의 모친상이 있는 성모전, 홍인대사 진신전, 오조스님 사리탑, 수행한 수법동굴,
디딜방아간 등을 둘러볼수 있다
6. 육조 혜능대사 (六祖 慧能大師 )
1) 혜능대사 ( 慧能大師 )
- 혜능 스님은 서기 638년에 광동성(廣東省) 신주(薪州)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노(盧)씨이고 속명이 혜능(惠能)이었다. 스님이 태어난 이튿날 아침, 이름 모를 스님이 찾아와 ‘혜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혜능 스님은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어렵게 자랐다. 천성이 어질고 착한데다 고향 마을에서도 소문난 효자였다. 당시 조혼하던 풍습이 있었지만 대사는 24세가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땔감 나무를 팔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무를 한 짐 지고 신주의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금강경(金剛經)>을 읽는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구절을 듣고 마음에 곧 깨달음을 얻었다.
혜능은 겉으로는 나무 장사나 하던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대단한 선근(善根)이 있었다. 그 선근은 오조사를 찾아 홍인 스님을 만남으로써 뿌리깊은 거목이 되었고 뭇 중생을 먹이고도 남을 열매로 화했다.
2) 대감사 (大監寺, 大梵寺)
대감사는 남방에서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소관(韶關)시 시내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대범사로 불리웠던 이절이 현재에는 아주 조그만 절로 명맥만 유지하는정도로 비춰지지만 , 당시 혜능대사께서 소주자사 위거의 요청으로 ‘육조단경’을 설하신 곳으로 알려진다. ‘단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하고 ‘경(經)’ 이란 이름이 붙은 유일한 조사어록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시끌벅적한 마을 저잣거리에서 여러 유학자, 일반인들을 향해 설한법은 불법이 곧 세간에 있음을 강조하신 중요한 대목으로 비춰지며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바로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한다’ 함을 자신이 온몸으로 보여준 설법인것이다.
** (문사수법회 경전학당) 육조단경을 배우면서 생각 -----
처음에는 단경의 내용이 특별할거 같은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육조께서 부처님의 <금강경>, <유마경>, <법화경>, <열반경> 등의 경전을 토대로 설하시는 내용이 전개됨에 따라 .
禪이란 특별하며 신비로운 불교로 인식되어진 생각이 깨어졌구요, 다시 불교의 맥과 공부의 중심을 잡는 계기도 되었으며, 역시 단경도 ‘나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 으로 귀결되는 법문 내용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3) 남화선사 (南華禪寺, 寶林寺)
육조단경에는 보림사로 알려진 남화선사는 광동성 소관시 시내에서 남으로 40여분거리 곡강(曲江)에 위치하고 있다.
남화선사 들어가는 문에 ‘曹溪’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조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마을에 조(曹)씨들이 많이 살고, 동구에 시내가 흐르고 있다 하여 ‘조씨 집성촌의 시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조계마을에 건립된 남화선사에 혜능 스님이 오래 주석함으로써 스님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계종’이나 ‘조계사’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특히, 祖殿에는 육조스님의 진신상(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남화선사의 뒤 산쪽에는 아름드리 나무의 울창한 숲으로 되어 있고 , 조금더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청나라 말기 이후 쇠미해진 중국 불교를 다시 중흥시킨 고승인 허운(虛雲)대사의 탑이 있다.
4) 광효사 (光孝寺, 법성사)
광효사는 광주시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혜능대사께서 오조로부터 의발을 전수 받은후 남으로 내려와 16년간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바야흐로 은둔 생활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내어 광효사에서 주지 인종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깍고 계를 받았던 곳이다.
광효사내에는 혜능대가께서 삭발후 탑에 모신 축발탑이 있다.
또한 광효사는 달마스님이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와 발우를 씻었다는 우물(洗鉢泉)이 있다. 또한 502년 지약스님이 인도에서 보리수를 가지고 들어와 심었다는 큰보리수가(古菩提樹) 있다
7. 동림사(東林寺)
동림사는 강서성 여산구내 위치하고 있으며,
동림사는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을 통해 그 원을 성취, 이미 10겁 전에 부처가 되어 지금은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는 아미타불을 앙망하는 중국 정토신앙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동림사의 정토신앙은 중국 역사상 후한이 멸망하고 수의 문제가 진을 멸망시키기까지의 정치적 분열시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에 출가 인연을 맺어 도안(道安·312∼385) 화상 문하에서 수행 정진 중이던 혜원 대사에게서 비롯된다. 전란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부처의 가르침을 연구하기 위해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산의 서림사로 거처를 옮긴 혜원이 서림사에서 법을 펴면서 그의 문하에 승려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더 이상 제자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혜원은 고민 끝에 강주 자사에게 새로운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해 서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림사를 세웠다.
이 때가 서기 384년.혜원은 동림사의 사격을 갖추고 390년에 동림사 반야대의 아미타불상 앞에서 123명의 제자들과 함께 재를 마련하고, 정업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약했다. 이 기약이 바로 그 유명한 백련결사(白蓮結社)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림사는 정토사상을 배우고 익혀 중생을 정토 세상으로 인도하는 중국 정토종의 본산이 되었다.
< 여산 동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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