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격지심이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참거나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특히 정진을 모시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체할 수 없는 경우를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소위 업장(業障)이 녹아내리는 것이라 말하곤 하는데, 정진을 함으로 인하여 체험할 수 있는 공덕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일 것입니다. 즉 감정을 드러냄으로 인하여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세상은 개개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렇고 주변의 여건이나 환경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구속이 아닌 자유를 지향합니다만 정해 놓은 범주 안에서 라는 한정을 두면 그것은 구속의 다른 말이겠지요. 그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고 구속받고 있는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로워라하면서 도리어 구속에 안주하게 되고, 집착한 것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이는 우리 인류의 미래를 상징하는 최대의 메타포입니다.
자유를 향한다 하면 우선 스스로 정해 놓은 범주를 무너뜨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스스로 정해놓은 범주라 하면 소위 고정관념과 형식주의, 율법주의 등이나 개인적으로는 자기 식의 주장들이지요. 이런 면에서 감정의 표출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어 자유를 향한 소중한 지향을 열어주는 돌파구라고 생각합니다.
불법은 인과법(因果法)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지요. 원인을 지었으면 그 과보를 받는 것이고, 그 결과 또한 원인의 다른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에 원인을 지어 넣으면 당연히 변화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결과만 앞세우면서 인과법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는 결정론적인 결과주의입니다. 결과가 고정되어 있다면 인과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짓는 것에 더 신중해야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벌어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정진은 원인을 짓는 일에 게으르지 않으려는 구도자의 최상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의 주민은 몸과 마음이 유연(柔軟)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을 짓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풍요롭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이참에 한번 되짚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와 감정표현에 대한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고정관념 중에서 감정에 대한 부분이 가장 오해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감정은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할 원수나 마군(魔軍)이라는 견해입니다.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아야 공부가 제대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보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면 수행력이 약해서 그런거라며 핀잔이나 심지어 꾸지람을 받기도 합니다.
불교 경전은 대부분 여시아문(如是我聞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으로 시작해서 환희용약(歡喜踊躍 : 기쁨에 겨워 펄쩍 뛴다)으로 끝납니다. 이처럼 불교는 신앙의 감흥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열정적인 종교입니다.
경전을 독송하다 보면 무척 감동적인 경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늘상 독송하지만 특히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다가오는 경구에 자신도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수보리 존자가 일찍이 이런 법문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며 슬피 울면서 당신의 감흥을 고백하는 장면은 실로 수보리존자만의 신앙고백이 아니겠지요. 또 부처님은 대중들을 '참 잘했다'라며 칭찬으로 기운을 북돋워서 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당신보다 먼저 열반에 든 제자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의 죽음 앞에 슬픔을 감추지 않으셨으며, 여든 노인의 모습으로 열반에 드실 때도 등이 아프다며 제자 아난에게 부축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고 담담하게 깊은 감흥이 교감되는 종교가 불교인데도 어느 결에 불교가 형식화되어 메말라 버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인생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빼면 무엇을 논하고, 어떻게 서로가 교감할 수 있겠습니까?
좋아도 좋다하지 못하고 싫어도 싫다하지 못하는 엄숙주의나 지나친 경건주의가 불교를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요소가 된다면, 대중교화를 최고의 기치로 내걸고 있는 불교와는 모순이 됩니다. 세상과 진솔하게 마주하며 감응도교(感應道交)하는 것, 이것이 불법(佛法)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세상은 개개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렇고 주변의 여건이나 환경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구속이 아닌 자유를 지향합니다만 정해 놓은 범주 안에서 라는 한정을 두면 그것은 구속의 다른 말이겠지요. 그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고 구속받고 있는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로워라하면서 도리어 구속에 안주하게 되고, 집착한 것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이는 우리 인류의 미래를 상징하는 최대의 메타포입니다.
자유를 향한다 하면 우선 스스로 정해 놓은 범주를 무너뜨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스스로 정해놓은 범주라 하면 소위 고정관념과 형식주의, 율법주의 등이나 개인적으로는 자기 식의 주장들이지요. 이런 면에서 감정의 표출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어 자유를 향한 소중한 지향을 열어주는 돌파구라고 생각합니다.
불법은 인과법(因果法)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지요. 원인을 지었으면 그 과보를 받는 것이고, 그 결과 또한 원인의 다른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에 원인을 지어 넣으면 당연히 변화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결과만 앞세우면서 인과법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는 결정론적인 결과주의입니다. 결과가 고정되어 있다면 인과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짓는 것에 더 신중해야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벌어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정진은 원인을 짓는 일에 게으르지 않으려는 구도자의 최상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의 주민은 몸과 마음이 유연(柔軟)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을 짓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풍요롭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이참에 한번 되짚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와 감정표현에 대한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고정관념 중에서 감정에 대한 부분이 가장 오해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감정은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할 원수나 마군(魔軍)이라는 견해입니다.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아야 공부가 제대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보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면 수행력이 약해서 그런거라며 핀잔이나 심지어 꾸지람을 받기도 합니다.
불교 경전은 대부분 여시아문(如是我聞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으로 시작해서 환희용약(歡喜踊躍 : 기쁨에 겨워 펄쩍 뛴다)으로 끝납니다. 이처럼 불교는 신앙의 감흥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열정적인 종교입니다.
경전을 독송하다 보면 무척 감동적인 경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늘상 독송하지만 특히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다가오는 경구에 자신도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수보리 존자가 일찍이 이런 법문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며 슬피 울면서 당신의 감흥을 고백하는 장면은 실로 수보리존자만의 신앙고백이 아니겠지요. 또 부처님은 대중들을 '참 잘했다'라며 칭찬으로 기운을 북돋워서 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당신보다 먼저 열반에 든 제자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의 죽음 앞에 슬픔을 감추지 않으셨으며, 여든 노인의 모습으로 열반에 드실 때도 등이 아프다며 제자 아난에게 부축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고 담담하게 깊은 감흥이 교감되는 종교가 불교인데도 어느 결에 불교가 형식화되어 메말라 버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인생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빼면 무엇을 논하고, 어떻게 서로가 교감할 수 있겠습니까?
좋아도 좋다하지 못하고 싫어도 싫다하지 못하는 엄숙주의나 지나친 경건주의가 불교를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요소가 된다면, 대중교화를 최고의 기치로 내걸고 있는 불교와는 모순이 됩니다. 세상과 진솔하게 마주하며 감응도교(感應道交)하는 것, 이것이 불법(佛法)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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