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법장비구의 48대원 중 18원에서 “다만 오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말기 바랍니다. 아미타불이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에 따라서, 사람들의 극락왕생 여부를 결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제외된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정법을 비방한다는 것은 자신의 참된 생명가치를 돌아보지 않은 결과이니, 벌인 인과에 따라서 당연히 제외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역죄입니다. 말 그대로 생명의 법칙을 거스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며, 아라한 즉 세상의 스승들을 죽이고, 공동체의 조화된 삶을 깨뜨리며, 부처님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우님은 “나는 결단코 오역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주장하는 사람이 실로 오역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태어나면서 어머니에게 피 흘리지 않게 한 사람 아무도 없고, 아버지의 걱정을 끼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참으로 자식을 키우시느라 부모님들의 허리는 휘셨고, 기력은 많이도 쇠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자식을 키우셨던 것입니다. 불효자이든 효자든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생명을 빌어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는 곧 부모님의 생명을 죽여서 현상계의 내가 유지되어 왔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라한이란 참생명 자리에서만 올곧게 사시는 성인입니다. 유명한 분만이 아닙니다. 숨어서 비록 이름은 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진리답게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무능력자, 사회 부적응자로 몰아붙이기 일쑤입니다. 해탈법이 아니라 생사법이 평가의 잣대입니다.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을 갖고 감히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제멋대로 재단합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자르듯, “이건 맛난 부위, 이건 맛없는 부위”하며 나눕니다. 취향에 따라 생명가치를 자르고 쪼개서 값을 매깁니다. 성인을 받든다고 하지만, 말장난의 수준을 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조화된 삶을 깨뜨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한히 조화롭게 사는 태도를 뜻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있으려면 반드시 작은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은 서로에게 상대적인 존재 이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생명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한가지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조화는 깨지고 맙니다. 제 발로 걸어간 지옥의 감방에 갇혀 괴로워하며, 날 좀 꺼내달라고 절규하는 격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극락왕생의 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지만, 이렇게 모순된 자신을 마주하지 않는 사람만은 스스로 제외될 뿐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 염불하는데, 어찌 왕생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정법을 비방한다는 것은 자신의 참된 생명가치를 돌아보지 않은 결과이니, 벌인 인과에 따라서 당연히 제외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역죄입니다. 말 그대로 생명의 법칙을 거스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며, 아라한 즉 세상의 스승들을 죽이고, 공동체의 조화된 삶을 깨뜨리며, 부처님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우님은 “나는 결단코 오역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주장하는 사람이 실로 오역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태어나면서 어머니에게 피 흘리지 않게 한 사람 아무도 없고, 아버지의 걱정을 끼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참으로 자식을 키우시느라 부모님들의 허리는 휘셨고, 기력은 많이도 쇠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자식을 키우셨던 것입니다. 불효자이든 효자든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생명을 빌어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는 곧 부모님의 생명을 죽여서 현상계의 내가 유지되어 왔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라한이란 참생명 자리에서만 올곧게 사시는 성인입니다. 유명한 분만이 아닙니다. 숨어서 비록 이름은 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진리답게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무능력자, 사회 부적응자로 몰아붙이기 일쑤입니다. 해탈법이 아니라 생사법이 평가의 잣대입니다.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을 갖고 감히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제멋대로 재단합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자르듯, “이건 맛난 부위, 이건 맛없는 부위”하며 나눕니다. 취향에 따라 생명가치를 자르고 쪼개서 값을 매깁니다. 성인을 받든다고 하지만, 말장난의 수준을 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조화된 삶을 깨뜨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한히 조화롭게 사는 태도를 뜻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있으려면 반드시 작은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은 서로에게 상대적인 존재 이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생명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한가지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조화는 깨지고 맙니다. 제 발로 걸어간 지옥의 감방에 갇혀 괴로워하며, 날 좀 꺼내달라고 절규하는 격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극락왕생의 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지만, 이렇게 모순된 자신을 마주하지 않는 사람만은 스스로 제외될 뿐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 염불하는데, 어찌 왕생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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