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길어지고, 낮이 길어진다는 동지의 의미는 따뜻함이죠. 따뜻함을 나누는 겁니다.
몸이 따뜻한 거부터 시작해가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까지.
그래서 법회에서는 동지를 ‘나눔의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럼 오늘 동지를 맞이해서 나눠야 되는데, 뭘 나눕니까? 팥죽도 나누고 또 나눌 수 있는 재물이 있으면 그 재물을 나눠야 돼요. 나눠줘야 돼요, 어떻게든.
작은 것을 나눌 때 큰 것을 나눌 수 있는 공덕이 쌓여집니다. 그 원리는 우리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무한한 공덕장이다. 그 공덕장은 있는데도 없다 그러면 없는 거잖아요. 있는 것을 있게 하려면 작은 것을 나눠야 됩니다. 보시. 그 보시의 작은 보시공덕이 마침내는 큰 공덕이 된다.
참 오늘도 보면 이렇게 팥죽공양을 올리시고 떡공양도 과일공양도 올리신 분들이 유독 많으십니다. 그런 분들 다 공덕을 찬탄합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것은 보시라 그러지 않고 공양이라 그러죠. 정말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공양 올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보시와 공양은 달라요. 그래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불보살님께 공양 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보시의 공덕이 된다는 거죠. 그렇게 부처님을 통해서 모든 부처님, 다시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중생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데 이런 떡공양 과일공양부터 시작한 모든 재물공양을 비롯해서 더 중요한 것은 법공양으로 중생에게 공양을 올리는 거예요.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으뜸이라고 보현행원품에서도 말씀하셨는데,
보현보살님의 열 가지 원을 나눠주고 일러주고 읽고 외우고 쓰면서 하는 그 공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크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그런 보시공덕,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재물보시에 대한 개념을 무시하는 게 아니죠. 그 공덕도 엄청 크지만 그러나 뭣보다 더 큰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에요. 이 지혜를, 지혜를 나누는 공덕이에요. 그게 법공양입니다.
이 동지에 팥죽을 먹는 의미는 액난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액난을 소멸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류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원이죠. 그런데 사실 그 재난과 액난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들이 내 바깥에 있는 경계로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두려움이죠. 그 두려움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는 어떠한 재물, 칠보든 뭐든, 재물보다도 지혜의 공양입니다. 그래서 법공양이에요. 부처님의 법을 일러주는 공덕보다 더 클 수 없다는 거죠. 지혜의 빛이 밝아지면 액난이나 재난이라고 하는 모든 건 저절로 사라진다. 원인 소멸이죠.
아까 보현행원품을 모셨지만, 거기에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원왕을 외우는 사람은 세간을 사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 마치 공중의 달이 구름 밖으로 나온 듯하다.”
그게 원력이란 말이죠. 보현보살의 원력이에요. 만약에 우리를 험난한 지경으로 몰아내시고, 몰아낸 다음에 ‘그래, 내가 구해줄게’ 하고 구해주는, 병 주고 약 주는 그런 분을 보살님이라고 한다면 참 우린 갑갑하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불보살님들의 원력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거, 그것이 우리에게 닥친 재난과 액난을 해결하는 길이고 방지하는 길입니다.
그와 같이 분명하게 부처님께서 경전을 통해서 말씀해주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고 봅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자 그런 의미를 우리가 새긴다면 오늘 팥죽으로부터 지혜에 이르는 공양이 얼마나 큰 공양이 됩니까. 또 우리의 삶 자체도 정말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모든 것이 공양, 보시, 다른 말로 우리가 표현해서 나눔이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좀 나눠줄 것인가. 그 따뜻함을 자꾸 전달하는 거, 그래야지 우리 마음도 사실 덩달아서 따뜻해지고 그에 의해서 우리 지혜가 열리게 되고 거꾸로도 중생에게 보시하듯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거와 똑같아지잖아요.
그런 상호 공양의 원리를 우리가 잘 이해만 하면 참 내 일상이 재밌어요. 두려움이 없어져요. 내가 내 밖에서 만난 불보살님께 공양 올리는 것인데. 그럼 내 주변이 전부 불보살님 천지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불보살님께서 옹호하고 계시는 거죠.
이 보시라고 하는, 나눔이라고 하는 이 물꼬를 트는 순간 그 세계는 확연히 달라진다.
자, 그런 마음으로 오늘 동지를 맞이합니다. 혹시 내가 인색해 있고 또 나누는 마음이 약해져있다면 오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베품과 보시 그런 나눔으로 따뜻함을 공유하는 그런 시간들이 되시길 기원하면서 부지런히 하여튼 정진하십시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정신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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