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인 것은 끝내 허물어진다
세상에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의지하던 것이 끝내 허물어질 때 많은 사람들은 넋을 놓습니다.
나이, 성별, 전공, 직업, 입장 등을 의지처로 생각하고, 이 속에서 내 삶이 보장되리라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어떨결에 벼슬, 지위, 명칭, 역할이 나라고 하는 착각에 익숙해집니다.
우리는 이렇듯 상대적인 의지처에 깜박깜박 속습니다.
자식 앞에서는 내가 처음부터 부모인 줄 알고, 부모 앞에서는 영원히 자식으로만 있는 줄 압니다. 직장을 믿고, 부모를 믿고, 동창을 믿고, 돈을 믿고, 건강을 믿고, 지식을 믿지만, 이들이 진짜 나의 궁극적인 귀의처인지 우리는 분명히 물어봐야 합니다.
나 스스로가 갖고 있는 귀의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에 귀의하고 있는가?
희곡작곡가로 잘 알려진 차범석씨의 작품 중에서 조선 말(末)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줄거리로 한 희곡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관직에 들어가 보니 조선이 망해갑니다. 출세는 해야겠고 돈도 벌어야겠는데, 이 사람 눈에 러시아가 제일 강국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러시아어를 공부합니다. 러시아공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종황제와 얼굴 도장도 찍으며 힘을 키웁니다. 그런데 강국인 줄 알았던 러시아를 일본이 전쟁에서 이깁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또 열심히 일어를 공부해서 일본사람들과도 친해졌어요. 한일합방이 되자, 일어도 잘하고 일본사람들과 교분을 튼 이 사람은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조선 사람들을 수탈해서 긁어모은 엄청난 돈으로 명문가가 되었지만 해방이 되어버렸어요. 해방될 때 보니까 일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걸 깨부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타났어요. 그때부터 빨리 영어를 배우려고 영어 학원을 다닙니다. 열심히 하는 와중에 미군정이 들어오고 미군들과 어떻게 하다가 길에서 죽는 얘기입니다.
항상하는 궁극의 의지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시대상 얘기겠습니다만은, 흔히들 ‘누구한테 기대면 무언가가 있겠지. 출세도 하고 집안도 좋아지고 국가적으로도 뭐가 되겠지.’하면서 의지를 하지만, 끝내 이것들은 모두 항상하지 않는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러한 상대적인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를 멈추지 못합니다.
상대적인 의지를 통해서 ‘나’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상대적임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적인 것이 꼭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지와 상대적인 의지의 차이는 뭡니까? 상대적인 의지라는 것은 때와 곳과 사람에 따라서 바뀌는 것입니다. 항상 하는 게 아니지요. 상대적인 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자기에 대한 정직성을 봤을 때, 비로소 궁극적인 세계에 의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궁극적 세계가 뭔지를 알아야 의지를 하지 않겠어요?
이 궁극적인 의지처가 바로 ‘서방대교주(西方大敎主)’입니다.
‘서방(西方)’이라는 것은 서쪽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상대 너머의 세계를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너가 아닌, 근본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지는 것은 늘 바뀌니까 어떤 조건에 의해서 변해가는 상대적인 것에 의지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상대적인 배후의 너머에서 오는 근본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참으로 대교(大敎)입니다.
큰 가르침인 근본적인 가르침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주(敎主)이신 아미타불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궁극적인 자리로 돌아가 의지하니, “나무(南無)!”합니다. 여기에서 ‘나무서방대교주(南無西方大敎主)’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진부한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요즘은 거의 모든 단위가 비즈니스입니다. 무언가를 했을 때 돈이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성적이 올라가는지 등 온통 비즈니스단위로 따져요. 그러다보니 상대적인 것을 뛰어넘는 큰 가르침의 주안점 없이 뜬구름 같은 정보가 많이 떠다니곤 합니다. 흘러가는 하나의 흔적을 가지고 무언가가 보장되리라 착각을 합니다.
돌아가신 분이지만 존경하는 분이기 때문에 가끔 백남준선생 얘기를 하곤 합니다.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물론 크게 찬탄합니다만, 저는 그분의 정직성을 항상 존경합니다.
일제당시에 이 분 집안은 일본 총독부에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로 부잣집을 넘어 골수 친일 집안이었습니다. 그러한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어요. 귀공자로 자란 것도 미안한데, 6.25가 나자마자 그날로 밀항해서 도망을 갔대요. 돈이 많으니까 유학이라는 미명 하에 도망을 간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국민한테 “저는 그때 참으로 못났던 사람입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사죄를 합니다. 이를 가지고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의 생각이 나다
대부분 ‘내 목숨과 재산을 보전해서 자식 잘 되게 하고, 후손들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가르침의 주안점일까요?
상대적으로 계속 바뀌는 의지처는 우리로 하여금 불안에 떨게 만듭니다.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나이, 입장, 체면 이런 거 다 떠나서 ‘내가 지금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한마디로 생각이 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생각이 나입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잘 생기고 아름다워도, 안에 근심걱정이 있는 사람은 옆에 사람이 다 알아봅니다. 근심걱정이 있는 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게 타고 찡그리고 있어요. 반대로 아무리 못 생긴 사람이라 할지라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입이 귀에 걸려있지요. 이렇듯 다 나타납니다. 자기 생각에 따라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것도 생각과 내가 따로 있는 적은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자는 생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덩어리인 식(識)이 윤회하는 겁니다. 상대적인 나의 세계 너머에, 즉 생각을 나타내는 그 자리에 우리는 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염불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을 생각하고, 나의 생명근원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나를 생각하면 염아(念我)! 돈을 생각하고 있으면 염(念)돈! 병을 생각하면 염병(念病)!이 되는 거죠.
내가 지금 무얼 생각하느냐가 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무얼 생각하는지 놓치지 않으며 상대적인 의지처가 아닌, 궁극적인 의지처에 나를 다 맡기며 나무!하고 살아야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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