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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저절로 채워진다네

문사수 2015.05.07 조회 수 14406 추천 수 0

  커피가 담긴 잔이 앞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잔은 커피잔으로 자연스레 불립니다. 밥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밥공기가 밥공기일 수 있는 것은 그 그릇에 밥이 담겨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커피나 밥을 다 먹고 나면, 이제부터 그것은 커피잔이나 밥공기로서의 기능을 마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레 비워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비워져 있던 상태일 따름입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채우고 나서 커피잔이나 밥공기라고 고정화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밥 한 공기를 비우고 나니 빈 그릇이듯이, 우리의 삶도 알고 보면 언제나 비워있어야 정상입니다. 빈 상태가 본래의 상태이고, 그것은 모든 현상들에게 동일합니다. 채워져 있는 측면만 취한다면 사뭇 다르게 느껴지지만, 비워진 상태라는 동일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사물이나 사람과도 대립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워있다고 하면 언뜻 허무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 오히려 무한(無限)히 채울 수 있는 상태가 우리들의 본래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항상 비운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갈 기회(機會)를 맞이한다는 의미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멋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며, 집안에 무엇이든 꽉 채워야지 안심하는 사람을 봅니다. 거실은 갖가지 가구들로 해서 가구점을 방불케 할 정도가 되어야합니다. 싱크대 찬장은 크고 작은 그릇으로 진열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장바구니는 아무튼 넘쳐날 만큼 되어야 하고, 옷장에는 빈틈없이 옷이 걸려 있어야 뿌듯해합니다. 도저히 빈자리가 남아 있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무조건 가득 차고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만족하고 사느냐하면 그도 아닙니다. 채우고 있을 때뿐, 금방 진력이 나고 맙니다. 마침내 불만(不滿)은 어디선가 배출구를 찾아내고야 맙니다. 대개의 경우 좁은 집을 탓하는 쪽으로 향합니다. 더 넓은 데로 이사가야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자, 그럼 끝없이 바깥에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른바 피그말리온효과(效果)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사례 한가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깜박 속인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그 학자가 나타나서는 학생들의 지능편차를 수치화 한 것을 달라고 하고서, 자기가 새롭게 지능조사를 하겠다는 제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와서 실시한다니까, 선생님들은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동의를 하고 기존의 조사된 자료를 건네주었습니다. 지능편차표(知能偏差表)란 학생들의 수업 태도라든가, 재능 발달에 있어서 선생님들이 참고할 기록이 담긴 표를 가리킵니다.
  선생님들로부터 지능편차표를 받은 그 심리학자는 얼마 후 다시 조사한 새로운 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결과물을 받아든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보기엔 분명히 지능이 낮다고 판정한 학생의 지능이 높다고 나왔으니,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심리학자가 담임을 불러서 이 학생은 지능이 높은데 거기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덧붙여서 그 학생을 유심히 살펴보라는 언질까지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선생님들의 반성(反省)으로부터 점화되었습니다. 막상 제시된 결과를 보니, 자기는 학습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아이의 조사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왔다는 것은,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는데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권위 있는 심리학자의 권유에 따라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배려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미처 시도하지 않았던 관심을 갖고 아이를 보게 되니, 자연히 그만큼 이 아이에 대한 기대(期待) 또한 높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선생님의 새로운 관심(關心)에 따라 학생 쪽에서도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진심으로 재능을 알아주고 있다고 믿게 되니, 비록 그 전에는 말썽꾼이고 공부에 관심 없던 아이가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과 학생 양쪽 모두에게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나면서, 당연히 바람직한 결과를 맞았음은 두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 실험을 했던 심리학자는 조작(造作)된 자료를 선생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능편차가 50 정도 되는 아이를 80정도로 높여서 통보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50이라는 자신의 규정을 폐기하고, 80이라는 새로운 기대치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믿음은 그대로 학생에게 전파되었고, 그에 걸맞는 기대효과가 자연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물론 수치조작이긴 하지만 앞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경우처럼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였을 때, 그에 상응한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 실험이 있기 전까지 선생님의 잘못된 편견(偏見)에 의하여 학생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 당사자의 자기한정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학습능력이 부족하다는 선생님의 규정이 알게 모르게 학생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바뀐 자료를 통해 발전 가능성을 인지한 선생님이 먼저 태도를 전면 수정함으로써, 학생측에서도 그 동안 포기하고 있던 학습의욕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교육현장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사람들마다 사물이나 사람 또는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그리 낯설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계기에 의해서든 한 번 굳어진 평가 잣대를 근거로 하여, 언제까지나 똑같은 규정을 하거나 혹은 순순히 규정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즉 비어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채우는데 급급한 세상살이를 하기 마련입니다. 삶의 모습들은 원래부터 굳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어져 있다는 착각에 동의하는 순간부터 꿈에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 않으려 합니다.
  비어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새로운 채움이 가능한 상태를 시사합니다. 무엇이고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을, 일회적(一回的)으로 끝내는 게 아닙니다. 비우고 또 비움으로써, 계속 새로운 삶을 맞이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이와 같이 무한(無限)의 자기, 다시 말해서 아미타(阿彌陀)인 참생명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한정된 상태를 제아무리 연장한다 해도, 그것은 언제까지나 결코 유한(有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깥의 강한 영향으로 빚어질 수도 있지만, 아무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벌어지지 않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규정의 틀이 참으로 있지 않음을 깨닫고, 깨달은 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개방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한의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기본 태도를 갖고 세상을 대하는 것이 다음 순서입니다. 살아가는 것은, 오직 자신이 택한 세상의 모든 것들과 만난다는 의미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가능성의 기회를 주듯이, 만남의 순간들마다 새로운 가능성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피그말리온효과처럼 별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굳어져 있는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보다 살만한 세상살이가 펼쳐지게 됩니다. 열등하거나 우수하다는 평가 잣대가 얼마나 상대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지는, 선생님의 긍정적인 관심으로 해서 일거의 뒤집힌 결과를 통해 짐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란 흔히 착각하듯 채워진 채로 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비워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는 권리이며, 그 권리를 존중하며 무한한 비움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각자 살아가는 의무입니다.
  비우라. 굳은 관념을 비우고, 규정된 행동방식을 비우고 또 비우라. 그래서 참생명이 자신의 무한능력인 아미타를 실현할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다하도록....
  원래부터 비운 삶이었기에!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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