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반성이란 꼭 윤리적인 입장에서 도둑질을 했다든지, 거짓말을 했다든지 하는 것만을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본래 중생이 아닌데 어리석은 중생 노릇을 했었구나!’ 라고 반성하는 겁니다. 이렇게 반성을 하고 보니, 내가 중생 노릇을 함과 동시에 내 주변 사람들 또한 모두 중생으로 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정말 부처라면 세상 사람을 무엇으로 봅니까? 다 본래의 부처님으로 보겠지요. 남들을 부처님으로 못보고 중생으로 보고 지낸 것은, 결국 내가 중생이라는 쓸데없는 고집에 빠진 것이 원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법문을 듣지 않으면 모릅니다. 법문을 들어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너는 지금은 중생이지만,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부처가 될 거야!’ 하는 법문은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어요. 흙덩어리를 백년 아니라 만년을 가지고 있어도 금덩어리가 되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실로 법문을 들으려면 ‘나무!’해야 합니다. 나는 본래 중생이 아닌데 중생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무명(無明)이에요.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그런 생각을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나무!’입니다.
‘나무!’하면 뭐가 남습니까? ‘나무!’ 하니까 진실 생명만 남습니다. 온 천지가 본래 부처님생명 밖에 없는 즉 아미타세상을 만납니다. 그런데 아미타(阿彌陀Amita)라는 부처님이 계시고 또 따로 중생이 있다고 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아미타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아미타는 상대유한 존재입니다. 그런 상대유한 존재가 어떻게 아미타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본래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니까 내 앞에 전부 부처님 밖에 없어야 아미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시어머니를 부처님으로 못 보았습니다. 며느리를 부처님으로 못 보았습니다. 남편이나 부인 또 자식들을 부처님으로 못 보고 지냅니다. 그것은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이죠. 원래 부처님 말고는 없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이것 참 부끄럽기 짝이 없죠? 그렇게 보여진 시아버지나, 며느리나 남편이나 부인한테 미안한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 미안한 겁니까? 나 자신한테 미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봤어야 했는데, 부처님으로 못 보는 바람에 나는 뭐가 됐어요? 나는 괜히 중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나오는 겁니다. “아!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나무!’ 해야겠다.”
나무 한다는 말은 ‘나’로 비롯된 일체 모든 것을 다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나는 중생입니다.’가 전부 다 부정되어 버리는 겁니다. 다 부정되면 뭐가 남습니까? 다 부정되면 온 천지에는 부처님밖에 안 계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게 나무아미타불이죠.
이런 의미에서 나무아미타불 말고 참다운 법문은 없는 겁니다. 이렇게 나무아미타불 법문을 들었으니 여러분은 참 복이 많습니다. 확실히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아미타 부처님이 정말 아미타 부처님이라면, 아미타 부처님 앞에 아미타 말고는 없어요. 아미타 말고 다른 것이 있으면, 아미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을 끌어내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불교신자가 많다고는 합니다만, 대부분이 부처님을 끌어 내리지 못해서 안달하는 모습들로 보입니다. 부처님이 떡을 못 잡수셔서 허기져 계시니까, ‘내가 떡을 갖다 드리면, 그 양반이 떡을 잡수시고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실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떡을 얻어 잡수시지 않으면 허기를 때울 수도 없을 정도로 복이 없는 분이, 무슨 복을 준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참다운 의미의 자기반성은 ‘나는 중생이오.’라는 생각을 없애 버리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아주 분명히, 노골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쭙니다.
“이런 법문을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십니다.
“수보리야, 그 사람들은 중생이 아니야. 그렇지만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야. 저들은 내가 보기에 중생이 아닌데, 자기 스스로가 자꾸 중생이라고 우기니, 중생이 아니라고도 말 못하잖아!”
그렇다면 여러분들을 중생으로 만들고 있는 인생의 적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가 자기를 공연히, 억지로 얽매어 놓고서 ‘나는 중생입니다. 중생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주팔자가 나빠요. 삼재가 들었어요.’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참 우습기 한량없죠?
그래서 진정한 자기반성이 ‘나무!’입니다. 나무는 일체 모든 것을 다 부정해버립니다. 나무는 다른 말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에요.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입니다. 법문을 확실히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겉으로는 열심히 듣고 있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글쎄... 저게 맞는 말일까?’ 이러면서 판정하려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으면 진정 듣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이렇게(如是)’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란 부처님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로 시작되는데,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부처님 회상에 1,200명 대중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 아난존자라는 분이 들었던 그런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물론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부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깊은 의미는 부처님의 법문을 여시(如是)-‘그것 그대로 들었습니다’-하고 완전히 인정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법문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수긍을 안 하면, 여시아문이 못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는 책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부터 부처인데 부처 노릇을 못하고 있었던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나의 참생명은 본래부터 부처님생명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부처입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 기억나시죠? 왕자가 궁을 나와서 거지 노릇을 하고 다니지만, 결국은 왕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괜히 거지 노릇할 이유가 없는데, 거지도 아니면서 자꾸 거지라고 우기고 다녔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법문을 듣고 보니까 ‘아! 나는 본래 거지가 아니었구나!’ 라고 이렇게 우리가 알게 되죠. 그래서 설법을 들어야하는 겁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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