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들음
 

저는 세 가지의 의문이 있습니다. ① 인과법을 전면 수용함이란 무슨 뜻인지요? ② “내가 없다”고 법문 주시는데 어디까지가 나[我]입니까? ③ 인연법이란 결정되어 있는 만남입니까?

문사수 2010.02.09 조회 수 9600 추천 수 0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일컫습니다.
즉 고해(苦海)의 세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인생은 고(苦)야”는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매순간 그리고 전 생애가 고통스럽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래도 삶 가운데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교차하면서 살아갈 희망을 놓지 않도록 합니다. 예부터 불가(佛家)에서는 생사(生死)의 유한 인생을 초극하고 절대 자유와 참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지녀야할 신심(信心)가운데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철저하게 믿으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인과를 철저히 믿지 아니하고선 진솔한 삶으로 - 절대 종교심을 일으키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삶 - 나아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 자신에게 펼쳐져 있는 현실은 모두가 인과의 현상입니다.
“콩 심은 곳에 콩 난다.”는 말처럼 어느 것 하나도 우연한 결과는 없습니다.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질병에 처할 확률과 게으른 자가 가난하게 살 확률이 더 높은 것은 1차적 인과법을 잘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식을 잘 듣고 이해하면서도 금연에 성공하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로서 인과법을 전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토록 전면 수용하는 것을 방해할까요? 그것은 업습(業習), 즉 몸에 익힌 습관이 우리를 인과에 순응한 삶을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영국의 어느 연구 기관에서 ‘흡연자가 정말 비흡연자보다 행복을 더 느끼고 살아가고 있나’를 주제로 연구한 결과 의외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재로는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일상생활에서 더 불평불만이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흡연자가 마음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은 흡연할 당시에만 습관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평온의 상태를 나타낼 뿐, 얼마가지 않아서 평온한 상태의 심리가 깨지게 됨과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지체 없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시 습관적으로 흡연이 반복되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연구결과를 통해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직시하고 수용하여, 어떤 의미로든지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반대로 어려운 현실이 올 때 무엇엔가 의지하여 잠시 회피하고 인식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자기 성장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향하게 되고, 결국은 더 감내하기 어려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인과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우주 삼라만상의 현상은 여여하게 펼쳐져만 갑니다. 이 같은 세계를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가느냐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스스로 행복과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범부 중생도 봄을 맞이하고 있고, 도인(道人)도 똑같이 봄을 만나고 있습니다. 똑같이 맞이하는 봄이건만 범부 중생은 봄을 대함에 스스로의 입장에서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좋고 그름을 분별하며 그 결과치에 집착함으로써 스스로 괴로움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도인은 봄이라는 현실을 전면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봄이 되어 노닐 뿐, 있지도 않은 어떤 괴로움이라는 현상에 걸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설명이 길었습니다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과법을 믿지 않거나 혹은 이해하였다 하여도 수용하지 않게 되면, 스스로 유한의 삶을 택하게 되는 중생생명의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인과법을 전면 수용한다는 것은 유한한 범부 중생의 삶을 부정하고, 오직 부처생명에 대한 주체적 자각으로 절대무한의 삶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부처생명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현실도 이익을 앞세워 얻음과 잃음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무한히 살려지는 은혜로 여기며, 참회와 감사와 찬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법을 전면 수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생명에 대한 집착에서 점점 자유로워지고, 부처님께서 법문주신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고 실천하게 되어집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 자는 결코 무아의 참뜻을 진실로 받아지닐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에 의지해 보면, 우리들의 눈․귀․코․혀․몸뚱이․생각 등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린 분명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릴 듣고, 내지 존재를 인식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선 없다고 하시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가 곡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의 눈․귀․코 등의 기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인식되어지는 나만의 가치, 즉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등을 절대적이라고 보지 말라는 가르침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화된 인식의 덩어리, 즉 업(業)인 것입니다. 그런 업으로써의 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 집착할 것이 못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업은 너무나 높고 견고하여 스스로 부정하고 타파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직 반야바리밀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고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만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인과법을 믿는 일입니다. 언제 어떤 경우라도 무슨 일이 내게 벌어지더라도 현실을 전면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서 크게 살려지고 반야의 법문이 펼쳐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이미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창조적 삶으로 향하게 합니다. 인연(因緣)이란 인과(因果)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된 사람에게는 숙명이 아니라 필연이며, 그 필연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받아들이는 현실임을 알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만큼의 가치를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자신의 마음 수준을 따로 떠나서 별개의 인연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발심(發心)한 법우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봄을 맞아 많은 농부가 지금 논과 밭에서 거름을 뿌리고, 땅을 뒤엎고, 새로운 농사를 준비합니다. 농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같아 보여도, 각기 흙을 대하는 마음, 생명을 대하는 마음은 차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모습과 환경이 같아 보일지라도 각기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다른 까닭에, 스스로 인연의 선택이 다르게 되고, 나아가서 가을에 얻을 수확의 결과도 다르게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단순히 이해의 수준이나 자신을 합리화 하는 도구로써 만나지 마시고, 자신감을 가지고 전면 수용하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삶의 성취와 자유를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명성법사>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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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
2010.02.09
신규 홈피 오픈을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3번 질문에 대한 답변이 좀 궁색해 보입니다.
인연법이 결정되어 있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정해져 있고, 죽어야 하는 싯점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해진 바 아무것도 없다고 금강경에서 말씀하셨으니 인연법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는데 어디로 갈지(죽어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부처님 계시는 서방정토로 가고자 하는것도 인간이 욕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둘째 질문의 내(我)가 없다는 육체를 가진 나와 육체를 벗어난 나가 동일하면 내가 없겠지만, 진정 육체를 벗어난 내가 존재하는지 유체이탈이란 희한한 방법들이 나타나는 현실에서 육체의 나와 육체아닌 나가 동일하지 않다면 즉 죽어서 윤회를 하며 살아온 이전의 모습들로 돌아간다면(상상이 잘 안됩니다. 하나의 나란 존재가 조선시대 포도군관도 되고 고려시대의 머슴도 된다면 하나가 하나아닌 셈이죠)육체의 나와 육체를 벗어난 나를 어떻게 수용해야하는지 점점 꼬입니다. 저는 이것이 풀어지지 않는 숙제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