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법우님은 신체적 혹은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 때, 주변을 쳐다보면서 누군가 나를 위안해주고 도와줄 거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1차적인 착각입니다. ‘내가 있다’는 근본적인 착각 속에서 사고를 반복해가는 한, ‘너도 있다’는 2차적인 착각을 반드시 만들어냅니다. ‘나’라는 틀이 있으면 반드시 ‘너’라는 틀이 형성되고, ‘세계가 있다’는 착각 속에서 윤회를 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 반복되면,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나와 관계되는 사물이나 사건, 내가 갖고 있는 이름이 반복되면서 끝없는 윤회를 면치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육신이 죽은 뒤에 어디에 가서 무엇으로 태어난다는 모습의 문제가 아닙니다. 1차적인 윤회를 시작으로 2차, 3차 윤회를 하면서 계속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급기야는 “너도 별 볼 일 없다.”느니 “세상은 다 그렇다.”는 진단을 내려버립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내가 있다’는 사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큰 가르침을 주고 계신 분이 승찬대사입니다. ‘신심명(信心銘)’을 지으신 삼조(三祖) 승찬대사의 극적인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건 간에 더 이상 윤회를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계속 윤회하는 것의 차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분은 불교사에서 손꼽을 만큼 무척이나 외롭게 살다 가신 분입니다. 기본적으로 나병(癩病) 환자라는 신체적인 특징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른바 문둥병이라고 불리듯이 보통 눈썹이 빠지고, 코가 문드러지고, 이빨이 빠지며, 살이 떨어져 나가는 병이지요. 오죽하면 예로부터 ‘업병(業病)’이라 부르며 만고의 흉악한 질환으로 여겼겠어요. 누구에게도 친해질 수 없는 신체적인 조건과 깊은 공부내용으로 인해 사방이 다 적(敵)입니다. 게다가 당시는 남북조 시대로 북주의 무제(武帝)가 사찰을 때려 부수고 승려들을 보기만 하면 목을 자르며 불교를 탄압했고, 소위 종단 지도자들이었던 사찰 주지들까지 승찬대사를 죽이려 해서 결국 산으로 들어가 도망을 다니십니다.
참회는 구도자의 몫
이 분이 젊은 시절에 이조(二祖) 혜가대사를 찾아갔습니다. 혜가대사는 문둥병에 걸려서 온 젊은이에게 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승찬대사는,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제가 어쩌다가 업병에 걸렸습니다. 이 죄를 참회(懺悔)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죄를 참회하고 싶습니다!”라는 이 말씀이 대단한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문둥병환자라는 자기실존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출발함과 동시에 자기진단을 하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업병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원인 없는 결과는 없겠지요. 전생은 기억이 안 나고 내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받고 있는 현실을 봤을 때 본인은 이 죄를 참회하고 싶다는 말씀인 겁니다.
그런데 이때 스승이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하시지요.
“네 죄를 가져와 봐라. 그러면 참회케 하리라.”
죄를 참회하고 싶다는 제자에게, 죄를 가져오면 참회케 하리라는 스승의 간결한 문답이 진실한 구도자의 면목으로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나를 설정하고, 너를 설정하고, 세상을 설정하는 윤회적인 삶에 대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드러냈을 때, 참회가 이뤄지는 겁니다. 그것을 건너뛴 채, 내가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계산하여 처지를 분석한 다음에 하는 건 참회가 아닙니다. 자기합리화요, 더 나아가 앞으로도 계속 윤회하겠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아주 좋은 윤회를 하려고 합니까?
더 좋은 것을 쫓아, 어떤 마음의 상태에 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얘기합니다. ‘어느 자리에 가면’, 혹은 ‘무슨 상태가 되면’ 무엇인가가 보장될 거라는 믿음 즉, 착각 하에서 반복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반복이 윤회라고 말씀했습니다. 끝없이 좋은 윤회를 채택하는 범주 안에서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합니다. 근원적으로 본래 삶의 틀이 없었는데, 틀이 만들어지고 나니 틀 속의 삶으로 계속 살아갈 수밖에요.
좋은 윤회는 궁극적이지 않다
구도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비록 틀 속의 삶으로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난 틀 속에 갇히지 않는 생명이라는 출발을 하는 이가 구도자입니다. 생명의 길은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열려 있는데, 특정의 것만이 나라고 얘기할 때 거기에 갇히는 겁니다.
세상은 내가 가진 경우의 수와 전혀 다른 데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가 벌어질까를 두려워 말고, 어떤 경우가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말이지요. 상황에 의해서 내가 있는 한, 그 상황이 아니면 우리는 항상 불행한 사람이 되니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딨겠어요!
‘멋지다’라고 얘기를 할 때에도 각자 갖고 있는 답은 각양각색인데, 우리는 동일한 걸로 착각을 합니다. 누군가는 수영복 입은 걸 멋지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거지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을 멋지다고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대상화된 어떤 것 속에서 통한다는 착각을 합니다. 언어적인 윤회라고 할 수 있지요. 꼭 몸뚱이만의 윤회가 아니라 언어를 비롯한 표현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윤회합니다.
예를 들어 재즈는 한 번 부르면 두 번은 똑같은 노래가 나올 수 없는데, 우린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기를 좋아하고, 그 가수가 어떻다고 얘기합니다. 가수 또한 자기가 받는 평가에 익숙해지면 그 사람도 윤회하는 거예요. 세상의 어떤 노래도 어떤 춤도 두 번 공연하는 것은 없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두 번째 숟가락은 없습니다. 항상 첫 숟가락이요, 항상 유일한 숟가락인 거죠. 호흡을 할 때도 똑같은 호흡을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똑같은 책을 여러 번 볼 때도 읽을 때마다 새 책이었기 때문에 읽었던 것이죠.
아무리 대상이 고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새로움을 만나게 되면,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삶은 윤회하지 않습니다. 설사 대상이 윤회해도 나는 윤회하지 않으니, 결국에는 대상도 윤회하지 않는 거죠. 윤회하는 사람 속에서 내가 윤회하지 않는 삶을 만났을 때, 너도 나도 다 깨달음의 세계를 살게 됩니다. 내가 바뀔 때 세상이 바뀌는 것이지, 남이 바뀌어야 되는 게 아닙니다. 남 보고 바뀌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럴 여유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바뀌어야 할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만 내가 바뀔 뿐입니다.
오직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밝히는 ‘나무아미타불’로, 내가 있다는 착각을 벗어나면서 말이지요.
자, 다 같이 들읍시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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