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기준점을 삼법인[三法印]이라 합니다. 진리의 법칙을 말씀하시는데, 모든 사물과 사람, 현상은 여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제 1법칙,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고정시켜서 볼 때,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기본 주기를 얘기합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그 아이가 병을 겪게 되고, 늙어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철학가들의 표현을 빌리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향해서 초읽기가 시작됐다’라고 얘기합니다. 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반드시 늙는다는 현상이 있고, 병이라는 현상이 있고,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마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현상이라는 것이지 본질이라는 얘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라는 것에 대한 인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남을 표현했다면 죽음 그 자체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을 우주론적, 사회구조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이루어지고 유지되다가 허물어지고 마침내는 산산이 흩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국가나 사회시스템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엄청 잘 나가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주가가 곤두박질하면서 허물어져 간다든가, 무척 출세해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든가, 어제까지도 강건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누워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상성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못하든 무상성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벌어지는 것이며, 우주도 성주괴공이라는 법칙성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무상성을 논리적으로는 납득할 것 같습니다만, 자기 삶으로 돌아가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외면하는데 능숙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돌아가셨다고 문상을 하면서도 나는 아니라는 사실에 태연히 살아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를 당합니다만 그것이 내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길 뿐 다시 버젓이 삽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드러나는 무상성에도 ‘나는 아니다’라는 인식에 익숙합니다.
이처럼 제행무상의 법칙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대입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내가 있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익숙한가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가 있을 것이라는 것, ‘내 것’이 있으리라는 믿음은 착각이며 미신(迷信)입니다. 내가 지은 관계가 항상 하리라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온갖 미신은 또 다른 미신을 나으면서 주변을 압박합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것을 압박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익숙함 속에서 그것을 자기 인생이라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고정되어 있다는 착각입니다.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 자리에서 고정된 것이 있다면, 실체가 안정을 갈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죽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모습의 반복을 안정이라고 할 수 있고, 고정된 모습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을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고정될 수도 없는 것일뿐더러 만약에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 있다면, 이것은 유동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죽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드러나고 있는 현상을 실체로 착각하여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고정되기를 바랍니다. 안정과 희망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자신을 속이면서 말이지요.
결국 자기 안정이란 미명하에 자기 은폐가 일어납니다.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실체, 나는 똑똑한 실체, 나는 돈 많은 사람, 나는 남자, 여자, 나는 나이 많은 사람, 나이 적은 사람 등 온갖 분별을 가지고 자신을 은폐합니다. 그러면서 은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속에서 또는 자기 개인의 삶 속에서 자기를 함몰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행위의 밑변에 ‘원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착각’이 동일하게 작동되고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낼 때, 고정되어 있는 무엇들- 인종, 남자, 여자, 출신 학교, 출신 지역, 심지어는 ‘학교 다닐 때 저 녀석은 공부를 잘했어’ ‘쟤는 운동을 잘해, 못해’ 등으로 온갖 것을 규정합니다.
남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속에서 ‘내가 있다’라는 안심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정된 실체가 있으면 내가 보장되지 않을까 착각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우리에게는 실제로 있지 않은데 있다고 하는 착각이 끝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착각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옵니다. 한마디로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맞는 현실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붕괴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개인으로 보면 생로병사요, 우주론적 입장에서 보면 성주괴공이 거스를 수 없는 삶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칙을 스스로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외면하면서 안정이라는 것을 앞세우다 보니까, 결국에는 자기 붕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습이 항상 한다고 했을 때, 이 착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가(佛家)에는 이런 착각을 불식시키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모래로 그리는 만다라입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가끔 접할 수 있는데, 갖가지 색으로 된 모래로 아주 아름답고 영롱한 만다라를 그립니다. 만다라 한 점을 그리기 위해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짧으면 며칠, 길면 몇 개월 동안이나 그 일에 매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정성스럽게 애써서 만다라를 완성하면, 완성되자마자 엎어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것도 무상하다는 것을 체득시키기 위한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고정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면, 만다라의 모습이 허물어질 때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무상성 속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상(無常) 그 자체 속에서 그 모습이 바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살펴보면 내적인 신진대사, 정신의 오락가락, 말의 다변성 등 수많은 것들이 무상을 드러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항상 하지 않다’ 는 것을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현실입니다. 모래를 아까워할게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지금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계속...................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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