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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南無로 산다

문사수 2012.12.20 조회 수 25202 추천 수 0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근본적인 특색은 공부할수록 지혜가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혜를 기술이나 특별한 재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혜는 진리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광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공부가 깊어질수록 지혜가 밝아진다는 말은 곧 광명이 남김없이 드러나서 ‘이 세상 어디에도 남이 없구나’ ‘남처럼 보였던 그 모든 사람들이 본래부터 나와 한생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이 밝혀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불교를 공부한다는 말은 ‘개별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라는 것이 본래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데, 개별 생명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과 한생명, 영원절대 생명인 아미타생명을 그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이론화시킬 것도 아니고, 어떤 사상체계를 세우는 철학도 아닌, 그러면서도 엄연한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불자(佛子)들이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 아주 어렵게 생각하지만, 불교를 한 마디로 얘기하면 나무(南無)입니다.
  나무(南無)를 다른 말로 하면 일체 모든 울타리를 다 부정해 버린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나무(南無)에는 귀명[歸命:내 생명을 바쳐서 돌아갑니다]의 뜻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바쳐서 돌아가는 곳이 나의 참생명이므로, 나의 참생명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참생명으로 돌아가면 참생명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테지만, 참생명과 나의 관계라 할 것도 없이 나의 참생명이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귀명이라는 말에는 귀일[歸一:하나로 돌아간다]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나무(南無)를 ‘나라는 존재가 절대 무한인 부처님 앞에 돌아가서 의지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렇게만 해석하면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공부해 나가다보면, 내가 본래 없는데, 없는 내가 어떻게 부처님께 다시 돌아가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의문이 깊어지다 보면 본래부터 부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어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없었던 새로운 사실이 새삼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게 아니라, 본래부터 있어왔던 그 엄연한 사실이 그대로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교신앙의 궁극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종교는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궁극의 의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절대무한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간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절대무한 앞에 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한자인 내가 절대무한 앞에 섭니다. 그래서 절대무한을 절대무한으로 인정하게 되면 저절로 유한인 나는 없어져 버립니다. 절대무한을 인정하는 돗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만큼 유한자인 나는 거기에 비례해서 부정되어 버립니다. 나라는 상대적 존재로서의 내가 부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무한 앞에 유한이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상대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내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받고, 다른 상대적 존재와 대립하여 생존 경쟁을 벌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요.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에 비추어 괴로움의 원인인 ‘상대적인 나’가 본래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괴로움은 저절로 해결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行)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전에도 공부했습니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그 구체적인 행위가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나무(南無)! 해서 우리가 절대자(絶對者)·무한자(無限者) 앞에 서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절대자나 무한자를 이야기하지만, 잘 살펴보면 다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자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唯一神)으로서의 절대자는, 내 밖에 따로 엄청난 권능을 가지고 세상을 주관한다는 것을 하는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은 절대자라고 하지만 나와 대립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나와 대립하여 내 밖에 따로 존재하는 한 상대적인 존재일 뿐, 절대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무한은 그런 논리와 전혀 다릅니다.
  시간적으로 무한하고[無量壽] 공간적으로 대립이 없는 존재[無量光], 즉 절대무한을 아미타(阿彌陀)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절대무한 앞에 내가 선다는 말은, 부처님 앞에 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앞에 서게 되면, ‘당신께서는 부처님입니다’하고 인정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부처님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여 대립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처님 앞에 선 나는 어떻게 되나요? ‘이미 중생으로서 나의 존재는 없어졌습니다’가 되어야 하죠. 당신을 부처님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이 세상은 온통 부처님만 계시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으로서 내가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중생인 나, 상대적으로 대립해서 존재하는 나는 없어져 버립니다. 본래부터 없던 것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없어졌다는 표현이 바른 것은 아니지만, 표현하자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본래부터 있는 것은 부처님뿐입니다.

  우리가 법당에 와서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고 예불을 올립니다. 아무 것도 아닌 거 같고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순간에 나도 절대 무한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불교신앙을 하시는 분들은 장님이 되어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가 부처님께 매달리면 부처님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떡도 바치고, 과일도 바치고, 부처님께 얼마나 간청하는데 부처님이 설마 나를 내버리시려고? 우리 아들 대학에는 꼭 붙여 주실거야’하며, 이런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부처님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렇게, 부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나는 본래 중생이 아닙니다’하는 것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님 앞에 서서 ‘나는 중생입니다’하고 우깁니다. 경문(經文)에는 분명히 제도할 중생이 없다고 나와 있는데도 ‘나 좀 제도해 주십시오’ ‘나보단 나으니까 나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이름을 부르고 주소를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절대무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처님밖에 없습니다’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밖에 없으므로 일인칭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앞에 서서 합장하고 ‘당신께서는 부처이십니다’라고 할 적에 ‘나는 본래 중생이 아닙니다’가 저절로 되어버립니다. 참 묘하죠?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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