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간다’라는 입장을 앞세우다보면 현실은 온통 불만족스러운 것 투성입니다. 자신의 만족만을 우선시하고 채우려하다 보니, 증오가 증오를 낳고 원한이 원한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추구하고자 하는 성취(成就)나 성공(成功)의 밑변에는 증오와 원한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자신의 성공,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실패를 딛고 서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자기의 삶을 누리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행복과 성공의 밑변에 그러한 불건강한 입장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 성공은 부끄러운 성공이며, 행복 또한 사실은 착취된 행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한한 베풂 속에서 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산다는 게 무엇인가?’ 끝없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산다는 게 뭘까?
자신의 삶의 울타리를 단단히 구성하면 할수록 그것이 삶인 것으로 치부를 합니다. 그랬을 때 대다수 삶의 태도를 크게 두 가지 방면으로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인 추구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추구입니다.
정신적인 추구를 할 때 간혹 물질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생각은 마치 세속적(世俗的)이라며 경멸하듯 바라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만 잘 추구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많은 정신주의(精神主義)가 빠지는 함정은 결국에 가서는 유령(幽靈)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를 우습게 알고, 인간관계를 우습게 알며, 자기가 살아온 세월이나 조상과 자손에 대한 책임마저 져버리고 맙니다.
예를 들어서 이슬람 근본주의나 KKK단과 같은 기독교의 극단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근본주의(根本主義)가 삶의 근본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이념(理念)의 근본주의가 됐을 때, 불행을 자초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것에 어긋나는 대상이 있을 때는 적(敵)이기에 척결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이런 입장에 섰을 때 세상의 어떤 사람을 죽여도 죄가 안 됩니다. 게르만 근본주의가 됐을 때 유태인 몇 백만 명을 죽일 수 있고, 유태인의 시오니즘(Zionism)적인 입장에 섰을 때 팔레스타인 사람 몇 백 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일이 자행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정신은 무슨… 지금 먹고 살기 바쁜데.’하면서 끝없이 돈만 모으고, 아파트 평수 늘여서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거나 명품 브랜드만을 선호합니다. 사실 명품중의 명품은 우리의 몸뚱이입니다. 부처님생명 임을 드러내주는 우리들의 몸이 명품인데 그 사실은 잊어버리고 내 밖에서 명품을 찾아 헤맵니다.
이렇듯 물질적인 환경조건에 의해서 자기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이것이 물질주의입니다. 이처럼 물질주의로만 끝없이 쫓는다면, 이것은 살찐 돼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것에 의해서 더, 더, 더를 추구합니다. 더 화려하고 더 안락하고. 그것이 물질적 잣대라면 우리의 삶은 살찐 돼지와 뭐가 다른 게 있을까?
이러한 물질주의와 정신주의는 인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양대 조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조화됐을 때 참으로 인류사가 풍요로울 것이고,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문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심각해집니다.
잠시 초등학교 과학시간으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얼음처럼 단단한 것을 고체라고 합니다. 얼음에 열을 가하면 물, 즉 액체가 됩니다. 그런데 물에 또 열을 가하면 수증기, 즉 기체가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이런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나[我]’라는 울타리, 집이 단단해 보일수록 주변에서는 ‘저사람, 참 확실해 보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정된 모습의 고체와 같이 단단할수록 쉽게 깨집니다. 우리는 ‘내가 산다’라는 입장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을 공고히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삶은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열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일러 ‘잇찬티카[생명의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 버린 사람, 볶은 씨앗]’이라고 하십니다. 볶은 씨앗에서는 생명의 싹이 트지 않습니다. ‘나’라는 집에 갇혀 모든 생명과의 교류를 닫아버렸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오직 염불 밖에 없습니다. 염불에 열을 올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염불의 열기에 녹아들게 되고 염불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때 업장(業障)이 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정화된 착각을 업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녹아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염불을 계속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유작용(思惟作用)이 일어나 ‘나’라는 울타리 안에 고정돼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더한층 가열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진짜 염불이 됩니다. 물이 수증기로 바뀌기 위해서는 100℃까지 끓어올라야 합니다. 기체는 ‘나’라고 주장할게 없습니다. 소리도 형체도 없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침내 내 염불이 없고, 내 공덕이 없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게 없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세상으로부터 공급받은 결과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농부들의 수많은 땀의 결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주변에 계신 온갖 선지식들에 의해서 지식과 정보도 받습니다. 자신의 미모, 재산, 근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다 공급받은 것이지 스스로 생산한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공급받는다’를 달리 표현하자면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없이 자신으로 살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려진다고 하는 이 진실에 눈을 떠야합니다. 결국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불행할 따름이고, 세상의 무한한 베풂의 은혜 속에 살려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분이십니다.
살려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때 진심으로 ‘나무!’ 하는 것입니다. 원효스님께서는 귀명(歸命)을 즐겨 쓰셨습니다.
귀명(歸命), 자신의 생명자리를 항상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란 ‘무한생명 무한광명’입니다. 항상 자신의 목숨 자리로 돌아가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목숨이 아니라 현상으로 돌아가다 보니 매이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니까 귀명, 목숨으로 돌아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일 때, 살려짐의 진실(眞實)에 눈뜰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립니다.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살려진다고 하는 이 진실에 ‘나무’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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