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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법문

상대(相對)와 절대(絶對)의 참된 뜻

문사수 2009.09.18 조회 수 32509 추천 수 0



온통 상대적(相對的)인 입장으로 가득 찬 세상살이입니다.

물론 ‘나’라는 자의식(自意識)이 있고, 이어서 그에 따르는 선택의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어떤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법우가 지나가는데 “야, 이 바보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헌데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콧바람을 씨근덕대는 사람이 있으니,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하는 게 딱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도 재미있게 읽었을 소설 중에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 있잖아요? 이중인격자(二重人格者)가 주인공이지요. 그런데 이 소설의 초고(草稿)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도 초고가 왜 없는가를 알지 못했는데, 백년이 흘러서야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스티븐슨이라는 작가의 부인이 우연히 남편이 써 논 원고를 봤나 봅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들고 나가서 태워버린 겁니다. 우리 처지라면 그 초고만 갖고 있어도 팔자를 고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 것입니다. 그럼 부인은 그것을 왜 태웠을까?

자기가 읽어보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얘기로 가득 차서, 이런 소설이 시중에 유포되면 남편도 망신이고 세상도 어려워질 것 같아서 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불후의 명작(名作)이라고 칭찬하는 것도 부인의 입장에선 혐오의 대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위대한 작가인 남편이, 부인의 눈에는 허풍쟁이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태워 버린 거죠.

 

그런데 이와 같은 상대적인 관점들이 과연 전혀 무가치하기만 할까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안티사이트라는 게 있습니다. 꽤 여러 가지가 있던데, 얼마나 해로운가 해서 몇 군데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반대를 뜻하는 안티(Anti)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당연히 상대에 대한 곱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는 비난이든 냉철한 비판이든 간에, 상대에 대한 관심(關心)을 바탕에 깔고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해서, 이런 긍정적인 면까지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곤란합니다.

우선은 싫겠지만 안티라는 것을 통해서 지적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욕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 화를 낼 때는, 거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겁니다.

 

따라서 상대의 반대편인 절대(絶對)만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절대가 그런 의미라면, 그런 상대 없는 절대는 내용이 텅 빈 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절대가 아닌 것입니다.

 

절대란, 말 그대로 상대가 끊어졌다[絶]는 뜻입니다. 엄연히 상대 속에서 살면서 상대 없는 절대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핏 무척이나 고상해 보입니다. 사이비(似而非)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눈에 띕니다. 절대를 추구하는 것을 나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를 껴안고서 절대를 추구해야지 상대를 떠난 절대는 절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절대가 없는 상대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대? 웃기는 소리하지마라. 돈만 있으면 된다. 우리 가족만 잘살면 그만이다. 누구를 도와줄 필요가 없어!”하면서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인생관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또한 엄청난 모순의 산물입니다. 절대 없는 상대의 세계만 추구한다지만, 이는 죽은 상대입니다. 왜? 생동감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고착화시켜서, 자기 생명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이어져 가고 있는지에 대한 그 생동감을 잊고 삽니다. 상대라는 것을 얘기하자면, 대표적으로 우리 몸뚱이, 나이, 벼슬 등과 친구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어느 하나의 일점일 뿐입니다.

이렇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상대인데, 이 상대라는 것이 항상 하는가?

항상 할 수 없는 데도 특정의 시간과 공간의 일점만 잡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교만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어리석음이 하늘을 찌를 만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절대는 있고 상대가 없다면 허망할 뿐이고, 상대만 주장하면서 절대를 잊고 산다면 우스울 따름입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어떤 대상화 된 것과 동일시했을 때의 그 상태가 바로 ‘나’라는 존재인 것입니다.

 

삶에서 벌어지는 선악(善惡)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선악이라고 하는 상대적인 현상(現象)이 발생은 하지만, 실재(實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의미가 뒤죽박죽 얽힌 것 같습니다. 해서 “나 왜 살아?”하는 물음이 일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굳이 억지로 설명이나 해석(解釋)으로 물음을 덧칠하려고 하지 맙시다. 왜 그런 상대의 반대편에 있을 절대적인 답을 강박적으로 추구해야 합니까? 물음을 통해서 자신의 상대적인 처지가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놓아두십시오.

더 이상 스스로를 들볶지 맙시다.

삶이란 그냥 살아갈 수는 있어도 설명이나 해석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자신 있게 설명할 사람이 있을까요?

흔히들 얘기 중에 이렇게 단정 지으며, 자기 삶을 장엄합니다.

“아마 내 지나온 날들을 소설로 쓰면 한 트럭은 될거야, 암!”

 

어찌 한 트럭만이겠습니까? 하루 24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한번 글로 쓴다고 합시다. 도저히 머리에 다 떠오르지도 않을뿐더러,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루가 그렇게 엄청나다면 좀 더 짧게 잡아서 한 시간 동안에 한정을 두고 시도해 볼까요?

초초마다 일어났다가 꺼지는 의식 변화나 남들에 대한 관찰이나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모으면 모을수록 기가 질릴 지경입니다. 거의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결코 하지 못합니다.

 

왜냐?

이렇게 엄청난 상대의 세계 한가운데서, 그 많은 상대를 상대하는 절대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에 그렇습니다. 상대화된 일점(一點)에 머물 새 없이 순간마다 상대의 세계를 연출해 가면서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moticon

1개의 댓글

Profile
아문
2012.07.13
절대만이 존재하고 상대는 없는것, 그리하여 허망한것 저는 이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닫음, 허망한 세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지배하는 상대의 유혹을 깨트리는 것이 불가의 뜻이라 생각하였는데, 안티를 말씀하시며 상대를 품는 절대를 말씀하시니 혼란스럽습니다. 또 한편으로 상대가 있음으로서 절대가 있다는 것이 자기 자신이란 말씀은 또 생각을 많이 해볼만한 주제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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