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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찌빠 그리고 부처님 손바닥

문사수 2017.11.04 조회 수 7992 추천 수 0

인생의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계속되는 선택(選擇)과 그에 따른 결과들로 가득 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거 때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왜 안하느냐?’고 질책하는 사람이 있지만, 참가하지 않는 것도 의사표현의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또한 선택인 것입니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자장면과 짬뽕 중에서 꼭 하나만을 선택해야 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점심을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굶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런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선택의 결과를 본인이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결정(決定)을 하지 않는 것도 결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면서 하는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자발적(自發的)인 결정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소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무척이나 그럴듯한 수사(修辭)로 장식되었지만, 이는 당시의 정치권력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공포되었음은 이미 상식에 속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국민 각자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사명이 아닌 것입니다. 그 발상은 특별한 집단의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숨겨진 동기(動機)의 결과일 뿐입니다.

새삼 이와 같은 국가적인 선택 그 자체에 대한 윤리성을 따지려함이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의 마음에 들던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임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선택이, 자기 생명(生命)의 선택이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어느 집안을 택했습니다. 어느 학교를 다녔고, 어디에 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생명 그 자체보다 앞서는 선택의 결과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러면 그 선택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묵찌빠’라는 놀이를 통해서 보다 확실히 하기로 합시다. 손의 모양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상호간에 승패가 갈립니다. 즉 놀이가 진행되는 모든 과정은 손이라는 상황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대적(相對的)인 상황은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입니다. 
갑자기 누구한테 묵(주먹)을 내밀어 봅시다. 지나가는 사람이 가만히 있겠어요? 괜히 이쪽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오해받아 줘 맞기 십상입니다. 또는 찌를 냈는데 삿대질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묵찌빠 놀이에서는 통합니다. 그 범주 하에서는 재미난 놀이일 뿐입니다. 재미난 놀이이지만, 그 상황에 동의하는 범주를 벗어났을 땐 폭력행위로 보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묵이냐? 찌냐? 빠냐?

그러나 선택을 함에 있어서 강박적(强迫的)인 태도는 금물입니다.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하리라는 사고방식은 상대적인 결과를 앞세웠기에 진정한 선택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묵을 내놓는 사람은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이랬을 때 묵이 어떤 결과를 받던 그것을 감당하겠다는 묵약 속에서  내놓는 것입니다. 묵은 꼭 찌만 상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빠도 상대하면서 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얘기하자면 결과를 앞세우기 때문에 강박이라는 겁니다.
‘이 선택을 하면 이번에 한방에 해결되는 거 아냐?’ ‘이 업종을 한번 선택해봐?’ 또는 ‘저 사람을 선택하면 노후가 보장될까?’ 뭐 이런 행태를 가리킵니다. 해서 결과를 앞세운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백전백패(百戰百敗)일 따름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계속되는 선택(選擇)과 그에 따른 결과들로 가득 차있을 따름입니다. 상대적인 결과를 앞세우지 않고, 인생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으로부터 말미암는 선택을 할뿐입니다.
묵찌빠라는 구도 하에서는 어떤 상대적인 입장의 표명도 가능합니다. 무엇이든지 짓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상대적인 모든 표현이 손바닥에서 벌어진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손오공이 갖가지의 도술을 부리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지만, 끝내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묵찌빠로 상징되는 온갖 상대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그 상대적인 세계를 불러온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의 모든 체험은, 묵이나 찌 또는 빠와 같은 나의 상대를 통해서 가능(可能)합니다. 살아가는 모습으로 본다면, 부처님 손바닥에서 벌어지는 묵찌빠의 주인공들인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한정적입니다.
“나는 몇 살까지 살면 장수한다고 할까?”
“얼마만큼 이름을 떨치면 내 인생이 보람 있다고 할까?”
하듯이 한정적인 데서 출발을 하는데 익숙합니다. 허나 출발이 한정적이기에 그 선택 또한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한정적인 선택의 결과는 항상 쫓기듯 살아야한다는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의식전환을 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하였듯, 인생은 무한한 선택입니다. 심지어 선택 안하는 것까지도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미리부터 상대를 앞세운 선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몇 살을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만 나이는 먹어가는 겁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누가 스무 살이 되려고 작정하고 산 사람이 어디 있으며, 어느새 쉰 살이 되려고 작정하고 산 사람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스무 살이라는, 쉰 살이라는 세월의 옷을 입고 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른바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이 선택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얼 그리 망설이고 살겠습니까?
어떤 상대적인 선택도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 손바닥으로 귀결(歸結)되는데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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