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수행
6.25직후에 불광동에 18평짜리 평화주택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그 집들이 다 없어졌을 테지만, 그때에는 거기에만 살면 다른 것은 바랄 것 없이 아주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18평짜리 집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50평이면 만족합니까? 60평, 80평, 100평에 산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영원히 행복을 모르는 채 불안과 공포의 위협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행복을 구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더라도 자동차만은 멋있는 것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집보다 더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자동차에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 사람은 남들이 가진 자동차보다 비싼 자동차를 갖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참생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큰 집에서 산다거나, 비싼 자동차를 타는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육신의 영달을 위하여 재산을 모으려 하고,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에는 동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동물학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개나 돼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 비로소 참다운 의미의 생명에서 비롯되는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회에 나온 그 날이 진정 사람 된 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절에 다니는 것인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보통 왜 절에 가느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절에 가니까 병도 없어지고,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하고, 자녀들이 대학도 들어가고… 그래서 참 좋아서 다닌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벌어지는 것인데, 처음에 기도를 드리고 불공을 드릴 때 상황이 좋아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아지고, 자녀들이 대학도 잘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또 인연이 되어서 몸에 병이 생기거나, 일이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 시기가 옵니다. 또 자녀가 대학을 들어가기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부모보다 많이 배웠다고 부모를 무시하고,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힘드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당황합니다. 또 지위가 높은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기준에 맞추어 일이 잘 풀릴 때는 부처님이 좋다고 하고,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부처님은 영험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켜 주시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부처님을 욕하고 원망합니다. ‘절에 다녀봐야 부처님 덕 보는 거 하나도 없더라’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기복불교(祈福佛敎)는 이처럼 언제든 부처님을 배신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며 복을 구한다는 것은, 부처님은 차별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이 만약 공양을 올리는 사람에게만 복을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분을 부처님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기복신앙을 하는 그 순간부터 부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가령 기생들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온갖 아양을 떨다가 손님의 돈이 다 떨어지면 더 이상 그 손님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공양 올리는 사람에게 특별히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열심히 다닌다 하더라도 법문을 듣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법문을 듣지 않는 사람은 불자(佛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불자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생명관이 바뀌고 세계관ㆍ인생관ㆍ가치관이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생명관이 바뀐 사람에게만 부처님오신날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경전의 첫 구절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이 신행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 듣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자꾸 들어야 합니다. 법당에 와서 법문 듣는 것도 듣는 것이지만, 경전을 읽는 것도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계속해서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법문을 들으면 인생을 잘못 살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몸뚱이를 나로 알고 살았구나… 그동안 이 몸뚱이를 위해서만 살아왔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동포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성불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생존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는 이익을 주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문사수(聞思修)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聞] 나 자신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思], ‘나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음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인생을 수정해가는 것[修],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수행(修行)입니다.
수행이란, 머리 깎고 산 속에 들어가서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자기의 일상생활을 수정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수행이라고 하면, 출가(出家)해서 산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참다운 수행은 남들과 다투기도 하고, 가족과 갈등하기도 하는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이 수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수영을 잘 하려면 어디에서 연습해야 합니까? 물속에서 수영하기 힘들다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수영하는 연습을 한다면 말이 됩니까? 방바닥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연습한다고 하더라도 물속에서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다운 수행은 내 마음이 비뚤어지는 그 현장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형제를 미워하기도 하고, 이웃 사람들과 다투기도 하는 일상 자체를 그 자리에서 수정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여태까지 부모를 모셨던 방식,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대하던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이란 이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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