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하여 부처님생명 성취합시다
여러분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한 데 모인 사람들은 같은 부류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싫건 좋건 간에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어떤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또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거듭합니다. 이게 인생이지요. 그중에는 얼마간 지속되는 관계도 있겠지만, 스치는 듯한 일회적인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네 삶이 본래 고정된 상태가 될 수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날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이 우리 삶의 실상인 것입니다.
과거란 우리가 벌인 생명현상이 일단락 지어졌음을 시사합니다. 다시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흔적일 뿐이지요. 따라서 과거에 이루어진 관계를 실체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魔)에 사로잡힌 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살아있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자리에서 분명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끄달려 다녀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감히 오늘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다시 유유상종의 법칙으로 이야기를 돌려 봅시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영역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너무나 가지가지라서 이루 열거하기조차 힘들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과 사건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습니다.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듣는다는 것은, 바꿔 말해서 우리가 이미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들의 세계 그 자체인 것이지요.
TV프로그램을 보기 위하여 채널을 돌리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즐기는 사람과 연속극에 가슴 조이는 사람의 세계는 각기 다릅니다. 순간마다 곳곳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싫고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에 관계없이 우리가 선택한 우리 삶의 동포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고 하여도, 우리에게는 항상 자신의 동포들과 함께 하는 것이 되지요.
이렇게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동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잘못된 상태에 빠져 있다면, 이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딱하지만 그 자신의 몫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면서 두 손 놓고 쳐다만 보시겠습니까?
물론 아니겠지요.
스스로 택한 삶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일은 아무리 미세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축구장에는 축구에 흥미가 없거나 축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기에서건 넓은 의미에서 축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이 자리에 동참한 법우들은, 스스로가 부처님생명임을 자각하고 있는 불자들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래부터 같은 동포인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현실로 복귀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만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야말로 착각중의 착각입니다. 나아가 나와 부처님만의 관계라는 직선적인 구도도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나 혼자 부처님께 열심히 공양 올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완전한 불자의 자세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얼핏 무척이나 진실한 모습인 듯하지만, 이는 아직 공양이 성취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데, 그럼 부처님은 누구에게 공양하실까요?
만약 부처님은 공양을 받기만 하시지 공양을 하지 않는 분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을 이보다 더 욕되게 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유불여불(唯佛與佛)이란 말씀 들어보셨습니까? 부처님은 다만 부처님과 더불어 있을 뿐이라는 의미지요. 부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중생은 존재치 않습니다. 온통 부처님만 있습니다. 싫은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따로 없습니다. 뿐인가요? 가난한 사람도, 사기꾼도 없습니다. 아예 비교의 잣대가 없으시기에 부족한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양을 올리십니다. 완전한 성취만이 있는 모든 부처님들을 찬탄하기 위하여 하루도 쉼 없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공양을 올리고 계실까요?
“선남자여,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 되나니,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중생의 고를 대신 받는 공양이며,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니라.”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법공양을 하고 계시는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가치가 중생생명이 아니라, 부처님생명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고 계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그럼 이와 같은 부처님의 법공양을 받고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오늘 법회에 모인 여러 법우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항상 베풂으로 가득 찬 법공양을 받고 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처지를 돌이켜 본다면, 부처님이 인정한 부처님생명으로서의 자격은 이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격이 주어짐과 동시에, 이에 따른 의무도 함께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직도 부처님생명으로서의 자격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법공양을 무한히 받는 만큼 부처님의 말씀과 행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으로부터 부처님의 대접을 받듯이,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 또한 그런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다가 온 공양의 성취가 손상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초 하나에 불을 붙여서 다른 초로 그 불을 옮긴다고 해서 불빛이 약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초 하나보다는 두 개의 불빛이 밝을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래서 말 그대로 무진등(無盡燈) 즉 다함없는 법공양을 전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은 무의미합니다.
갑시다.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합시다.
오늘도 법공양을 기다리는 세상의 부처님생명들께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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