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음으로 하는 수행
내외간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부모 자식간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자식을 키우는데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벌어졌다고 하면, 이게 모두 무슨 문제겠어요? 문제의 모양은 여러 가지지만 내용은 하나입니다. ‘나는’과 ‘내 것’을 내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시초는 남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이 불행의 시초입니다. ‘나는 어떻게 되고, 내 것은 어떻게 되고, 나는 굶어죽으라고’ 하면서 자꾸 ‘나’를 내세우는데서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하는 것은 ‘나는’ 하는 것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나는 본래 없습니다. 본래부터 부처님생명 아미타(阿彌陀)만이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나오면 얼른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나는 본래 없고, 부처님생명만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자꾸 외워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잊어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 불교인데, 보시(布施)를 한다든지 계(戒)를 지킨다든지 할 때, 자꾸 내가 잘나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나의 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남들은 못하는 어려운 것을 나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지키고 있으면서 ‘나는 계를 잘 지키니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나 잘났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므로 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닙니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욕이란 억울하고 분한 일을 참는 것인데, ‘나는 불교를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잘 참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참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잘 참는 사람은 내가 참는다는 생각도 없이 참는 사람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내 밖에 남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한테 억울하고 분한 일을 해왔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억울하고 분한 일을 해오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악한 사람이라고 보나요? 악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는 것은 상대방을 악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보다야 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잘 참았다고 할지라도 ‘나쁜 놈’ 이라고 하며 비판하고 얕잡아보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운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벌써 나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는 즉시에 ‘아 나에게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강하구나, 참 부끄럽구나, 나를 내세우는 마음이 많구나’ 를 알아서 얼른 나무아미타불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 인욕이니까 이렇게 참는다는 것도 내세울게 없습니다.
즉, 보시(布施)든, 지계(持戒)든, 인욕(忍辱)이든 ‘내가 이만큼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사실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없다[無我]’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불교 수행이기 때문에, 보시를 하되 보시를 하는 내가 없고, 계를 지켰으되 계를 지키는 내가 없고, 억울하고 분한 일을 참았으되 참는 내가 없는 것이 불자들의 참 공부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아(我)가 없음을 알아 인(忍)을 얻어 이루게 되면’이라고 설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이나 보현행원품을 공부하는 것은 내가 본래 없다는 것이 드러나도록 공부하는 것이지, ‘금강경을 많이 읽으니까 나는 이만큼 잘났다’든지, ‘내가 금강경을 많이 읽으니까 부처님께서 나에게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나’를 자꾸 긍정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면 얼른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나를 없애는 것이지, 결코 다른 공덕을 별도로 얻으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내가 없는데, 공덕을 지어서 내가 차지하려 하는 것이 참생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없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공덕을 짓고 그것을 모두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는 ‘지은 바 공덕을 탐착하지 않나니’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탐착(貪着)하는 것 자체가 ‘나’를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내세워야 잘사는 것으로 압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면, 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어두운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이 자꾸 무거워지면 무거워질수록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또한 나라는 마음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극락에 가기가 쉬워지지요.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내외간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부모 자식간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자식을 키우는데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벌어졌다고 하면, 이게 모두 무슨 문제겠어요? 문제의 모양은 여러 가지지만 내용은 하나입니다. ‘나는’과 ‘내 것’을 내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시초는 남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이 불행의 시초입니다. ‘나는 어떻게 되고, 내 것은 어떻게 되고, 나는 굶어죽으라고’ 하면서 자꾸 ‘나’를 내세우는데서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하는 것은 ‘나는’ 하는 것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나는 본래 없습니다. 본래부터 부처님생명 아미타(阿彌陀)만이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나오면 얼른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나는 본래 없고, 부처님생명만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자꾸 외워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잊어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 불교인데, 보시(布施)를 한다든지 계(戒)를 지킨다든지 할 때, 자꾸 내가 잘나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나의 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남들은 못하는 어려운 것을 나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지키고 있으면서 ‘나는 계를 잘 지키니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나 잘났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므로 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닙니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욕이란 억울하고 분한 일을 참는 것인데, ‘나는 불교를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잘 참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참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잘 참는 사람은 내가 참는다는 생각도 없이 참는 사람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내 밖에 남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한테 억울하고 분한 일을 해왔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억울하고 분한 일을 해오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악한 사람이라고 보나요? 악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는 것은 상대방을 악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보다야 참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잘 참았다고 할지라도 ‘나쁜 놈’ 이라고 하며 비판하고 얕잡아보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운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벌써 나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는 즉시에 ‘아 나에게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강하구나, 참 부끄럽구나, 나를 내세우는 마음이 많구나’ 를 알아서 얼른 나무아미타불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 인욕이니까 이렇게 참는다는 것도 내세울게 없습니다.
즉, 보시(布施)든, 지계(持戒)든, 인욕(忍辱)이든 ‘내가 이만큼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사실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없다[無我]’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불교 수행이기 때문에, 보시를 하되 보시를 하는 내가 없고, 계를 지켰으되 계를 지키는 내가 없고, 억울하고 분한 일을 참았으되 참는 내가 없는 것이 불자들의 참 공부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아(我)가 없음을 알아 인(忍)을 얻어 이루게 되면’이라고 설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이나 보현행원품을 공부하는 것은 내가 본래 없다는 것이 드러나도록 공부하는 것이지, ‘금강경을 많이 읽으니까 나는 이만큼 잘났다’든지, ‘내가 금강경을 많이 읽으니까 부처님께서 나에게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나’를 자꾸 긍정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면 얼른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나를 없애는 것이지, 결코 다른 공덕을 별도로 얻으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내가 없는데, 공덕을 지어서 내가 차지하려 하는 것이 참생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없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공덕을 짓고 그것을 모두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는 ‘지은 바 공덕을 탐착하지 않나니’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탐착(貪着)하는 것 자체가 ‘나’를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내세워야 잘사는 것으로 압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면, 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어두운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이 자꾸 무거워지면 무거워질수록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또한 나라는 마음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극락에 가기가 쉬워지지요.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대중법문] [방송종료 : 11월 첫째주 대중법회] 불교 조각예술에서 듣는 경전의 세계 - 정신 법사 | 문사수 | 2023.02.12 | 8585 |
의무로 살지 맙시다 2 | 문사수 | 2010.10.28 | 27402 |
염불의 패러독스 | 문사수 | 2010.10.16 | 24482 |
참답게 불교에 입문한 사람 | 문사수 | 2010.10.06 | 26235 |
상이 상 아님을 보면 | 문사수 | 2010.09.25 | 23885 |
지옥무한 | 문사수 | 2010.09.18 | 24075 |
초심자의 마음으로 산다 | 문사수 | 2010.09.10 | 29780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 | 문사수 | 2010.09.04 | 23739 |
삶의 중심에 계신 부처님 | 문사수 | 2010.08.27 | 23459 |
자신이 싫어질 때 | 문사수 | 2010.08.20 | 27495 |
생명해방의날 우란분재 | 문사수 | 2010.08.13 | 24626 |
공양하고 계십니까? | 문사수 | 2010.08.10 | 27209 |
업력의 힘을 자각하자 | 문사수 | 2010.08.03 | 25475 |
기도는 무한생명의 자각 | 문사수 | 2010.07.23 | 25654 |
내가 없음으로 하는 수행 | 문사수 | 2010.07.15 | 24070 |
부처님의 회향 | 문사수 | 2010.07.10 | 23413 |
절대자유에로의 길 [금강경6] | 문사수 | 2010.06.28 | 32869 |
여래사(如來使)로 산다 | 문사수 | 2010.06.28 | 24523 |
내 마음을 항복받는다 1 | 문사수 | 2010.06.20 | 27180 |
염불로 눈을 뜨니, 살만 하구나 1 | 문사수 | 2010.06.14 | 26580 |
타성의 옷을 벗자 | 문사수 | 2010.06.06 | 29972 |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