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항복받는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실까요?
부처님께서는 이 세계를 본래부터 절대 무한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로 보십니다.
똑같은 세계를 우리가 보는 것과 부처님께서 보는 세계가 다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부처님을 만나서 따져 물어야 할까요?
“당신께서 이 세상을 상락아정으로 보셨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이 세상이 괴로움 천지입니다”
라고 하면서 우기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근본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부처님이란 어른은 지혜의 눈이 밝아져서 진리 그 자체로서 드러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중생이란 무명(無明)업고(業苦)에 시달리면서 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장님노릇을 하고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렇게 장님노릇하고 있는 중생이 보는 것과 눈이 밝은 분이 보는 것이 다르니까 토론을 해서 시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은 밝으신 어른이니까 그 분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부처님께서 보시는 세계만을 인정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바른 신앙자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견해를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 나오는 말로 하면 항복받는다는 말과 같으며, 이것이 바로 나무(南無)입니다.
내가 뭘 느끼고 있든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든지, 그런 모든 것은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고집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왔을 적에
“당신이 보는 것이 진리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를 내버리겠습니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하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있는바 상’이란 우리들이 형상으로 볼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내지는 마음으로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이 참으로는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계를 보는 그 세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보는 상대세계는 본래 없다는 말이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하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면 - 만약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보이는데 구름이 하늘이 아니라고 보게 되면, 구름이 걷힐 때 거기에서 푸른 하늘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보이는 세계는 우주와 인생의 참모습이 아니다’라고 하여 우리가 보는 세계를 다 부정해 버렸을 때, 거기서 곧 여래를 보는 것입니다. 여래를 본다는 말은 바로 진리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이라는 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 있는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버리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생을 보고 있는 거, 세계를 보고 있는 거, 또 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진실이 아니니까 항복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혹은 여러 가지 판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학식도 있을 수 있고,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도 있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상식도 있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진실 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모두를 항복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
있는바 일체 중생 종류인 혹 알로 생기는 것, 태(胎)로 생기는 것, 혹 습(濕)으로 생기는 것, 혹 화(化)하여 생기는 것, 형상 있는 것, 형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도록 하여서 멸도(滅度)하리라.
무여열반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를 말합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웠으면 부처님 법을 부지런히 전달해 주어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 이 육신이 본래부터 내가 아니었구나, 내가 본래부터 부처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쳐 들어가서 열반의 세계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열반의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번뇌가 없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뇌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유한의 세계가 진실로 없다는 것을 알아서 무여열반에 들도록 인도해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본래부터 중생이 있었는데, 그 있는 중생이 무여열반에 든다는 말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여열반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없는 것을 창조하는 세계인가요? 아니면 본래부터 있어 왔던 것을 없는 줄 착각하다가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가요?
깨달음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여열반에 들게 해서 해탈을 얻게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 부처가 되게 한다는 말이고, 이 말은 깨치기 전에도 본래 부처란 말이 됩니다.
흔히 깨치기 전에는 중생이었다가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얘기하면서 깨달음이라는 행위가 중생을 부처로 바꿔놓는 창조행위처럼 생각합니다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실은 처음부터 부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깨치고, 안 깨치고는 그 사람 소관입니다.
따라서 법을 전해주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금은 중생이지만 부처님 법문을 듣고 후일에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부처라는 얘기입니까?
처음부터 부처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적에 그 모든 사람들을 처음부터 부처님으로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깨쳐서 부처되도록 인도해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나쁜 사람, 못난이, 천한 사람으로 보이거나 말거나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부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하는 목적은 그 사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되도록 해주는 것이지, 부처가 아닌 사람을 부처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마음의 자세는 당연히 그 모든 사람들을 처음부터 부처님으로 대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사람 전부를 부처님으로 대접해 나가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가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에 넣어서 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나 실(實)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멸도(滅度)한다는 것은 다 열반에 들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반에 들도록 했는데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고 하라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본래부터 부처였던 것을 부처되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쪽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이 깨치고 안 깨치고에 관계없이 본래 처음부터 부처님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하 이 세상 사람을 볼 적에 겉모양으로 보면, 여러 가지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겉껍데기에 속지 않고, 알맹이를 보는 입장에 서면 이 세상 사람이 원래부터 모두가 부처님이구나’를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마음을 항복받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실까요?
부처님께서는 이 세계를 본래부터 절대 무한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로 보십니다.
똑같은 세계를 우리가 보는 것과 부처님께서 보는 세계가 다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부처님을 만나서 따져 물어야 할까요?
“당신께서 이 세상을 상락아정으로 보셨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이 세상이 괴로움 천지입니다”
라고 하면서 우기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근본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부처님이란 어른은 지혜의 눈이 밝아져서 진리 그 자체로서 드러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중생이란 무명(無明)업고(業苦)에 시달리면서 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장님노릇을 하고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렇게 장님노릇하고 있는 중생이 보는 것과 눈이 밝은 분이 보는 것이 다르니까 토론을 해서 시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은 밝으신 어른이니까 그 분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부처님께서 보시는 세계만을 인정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바른 신앙자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견해를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 나오는 말로 하면 항복받는다는 말과 같으며, 이것이 바로 나무(南無)입니다.
내가 뭘 느끼고 있든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든지, 그런 모든 것은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고집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 세계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왔을 적에
“당신이 보는 것이 진리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를 내버리겠습니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하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있는바 상’이란 우리들이 형상으로 볼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내지는 마음으로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이 참으로는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계를 보는 그 세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보는 상대세계는 본래 없다는 말이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하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면 - 만약 모든 상이 상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보이는데 구름이 하늘이 아니라고 보게 되면, 구름이 걷힐 때 거기에서 푸른 하늘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보이는 세계는 우주와 인생의 참모습이 아니다’라고 하여 우리가 보는 세계를 다 부정해 버렸을 때, 거기서 곧 여래를 보는 것입니다. 여래를 본다는 말은 바로 진리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이라는 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 있는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버리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생을 보고 있는 거, 세계를 보고 있는 거, 또 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진실이 아니니까 항복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혹은 여러 가지 판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학식도 있을 수 있고,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도 있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상식도 있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진실 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모두를 항복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
있는바 일체 중생 종류인 혹 알로 생기는 것, 태(胎)로 생기는 것, 혹 습(濕)으로 생기는 것, 혹 화(化)하여 생기는 것, 형상 있는 것, 형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도록 하여서 멸도(滅度)하리라.
무여열반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를 말합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웠으면 부처님 법을 부지런히 전달해 주어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 이 육신이 본래부터 내가 아니었구나, 내가 본래부터 부처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쳐 들어가서 열반의 세계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열반의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번뇌가 없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뇌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유한의 세계가 진실로 없다는 것을 알아서 무여열반에 들도록 인도해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본래부터 중생이 있었는데, 그 있는 중생이 무여열반에 든다는 말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여열반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없는 것을 창조하는 세계인가요? 아니면 본래부터 있어 왔던 것을 없는 줄 착각하다가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가요?
깨달음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여열반에 들게 해서 해탈을 얻게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 부처가 되게 한다는 말이고, 이 말은 깨치기 전에도 본래 부처란 말이 됩니다.
흔히 깨치기 전에는 중생이었다가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얘기하면서 깨달음이라는 행위가 중생을 부처로 바꿔놓는 창조행위처럼 생각합니다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실은 처음부터 부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깨치고, 안 깨치고는 그 사람 소관입니다.
따라서 법을 전해주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금은 중생이지만 부처님 법문을 듣고 후일에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부처라는 얘기입니까?
처음부터 부처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적에 그 모든 사람들을 처음부터 부처님으로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깨쳐서 부처되도록 인도해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나쁜 사람, 못난이, 천한 사람으로 보이거나 말거나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부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하는 목적은 그 사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되도록 해주는 것이지, 부처가 아닌 사람을 부처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마음의 자세는 당연히 그 모든 사람들을 처음부터 부처님으로 대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사람 전부를 부처님으로 대접해 나가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가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에 넣어서 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나 실(實)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멸도(滅度)한다는 것은 다 열반에 들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반에 들도록 했는데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고 하라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본래부터 부처였던 것을 부처되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쪽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이 깨치고 안 깨치고에 관계없이 본래 처음부터 부처님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하 이 세상 사람을 볼 적에 겉모양으로 보면, 여러 가지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겉껍데기에 속지 않고, 알맹이를 보는 입장에 서면 이 세상 사람이 원래부터 모두가 부처님이구나’를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마음을 항복받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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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2010.07.02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