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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감에서 벗어나려면

문사수 2010.04.21 조회 수 27318 추천 수 0

 부족감不足感에서 벗어나려면

가끔 보면 하늘을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비가 너무 많이 내리거나 반대로 이어지는 가뭄으로 농사를 망친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가하면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다고 생각하는 사업가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기대치(期待値)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속내를 그렇게 드러내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항상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판단의 잣대가 옳은가’하는 것입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솔직히 묻자면 ‘과연 그 정도로 확실한 잣대가 있기나 한가?’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잣대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냐를 따지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상대적인가 하는 것은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얘기입니다.
맞습니다. 본래부터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기입장이라는 것을 설정한 채로 세상을 바라보며 인생을 논(論)합니다. 이는 곧 끝없는 부족감을 등에 지고 한평생 살아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더 건강하고 싶고, 연세가 드신 분들은 더 오래 살고 싶고, 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분들은 우리 아이가 전교 1등하길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지체가 불편한 자녀를 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활동까지는 그만두고라도, 아이가 제대로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원이 없겠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각자마다 부족감에 시달리게 만든 범인은 누구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부족감이 발생하는 원인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려는 사고방식에 익숙합니다.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더 나아가선 세계적인 환경문제나 경제문제와 같은 것들로 해서 삶이 뒤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 우리들의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 평소의 자신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單語)가 무엇인가를 점검하기 바랍니다.

아마 이것저것 머리를 스쳐 지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유력한 후보는 ‘나’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나로서, 나에게, 나를, 나는…’ 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마치 약방문마다 따라다니는 감초와 같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강력한 어투로 내뱉으면서….
온통‘나’입니다. 주고받음의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비롯되어 나로 귀결(歸結)됩니다. 크고 작거나 많고 적다는 판단은, 적어도 ‘나’라는 존재가 없이는 눈꼽만치도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나’가 그렇게 느끼고 있기에 그런 현상이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이와 같이 부족감이 발생하는 원인을 캐고 보면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혹시 못난 마음으로 ‘내 탓이요’로 시작하자는 게 아닙니다. 내 탓이라고 지적할 내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떨어져있거나, 사회와 떨어져있거나 또는 가족과 떨어져있는 내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로부터 그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하신 처음의 말씀이 뭡니까? 부처가 출현하든 말든 연기법(緣起法)은 역연하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다시 얘기하자면 깨달음의 내용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지, 누구만의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에는 비밀이란 게 아예 없습니다.
각자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 그것 이외에 인생이 따로 없습니다. 참으로 간단합니다. 나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나에게 다가온 세상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나’가 받아들인 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랬을 때 너도나도 외치는 게 있습니다.
“나에게 자유(自由)를 달라!”
고 말입니다. 정치적이거나 물리적인 자유를 얻으면, 내가 자유로울 것이라는 뉘앙스를 한껏 풍깁니다. 허나 이는 서양적인 관점의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자유는 너와 나의 관계에서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다른 쪽에게 종속(從屬)되기 마련입니다. 내가 너에게 종속 될 수도 있고, 네가 나에게 종속 될 수도 있습니다. 부인이 나의 노예일 수 있는가 하면, 내가 부인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자식의 노예가 될 수 있는가 하면, 자식이 나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님을 만약에 종속관계로 본다거나 또 거기 찾아간 손님이 주인을 종속적으로 보는 한, 그 식당에는 결코 평화가 없습니다. 돈만 왔다 갔다 할 뿐이지, 그 안에서 생명의 교류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입장 가운데 있어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자유를 구사하려는 ‘나’만 남습니다.

반면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자면 자유(自由)란,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는다.”
는 뜻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미암고 사는 인생의 주인이 살기에 본래부터 잃을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유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니까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잃을 게 아예 없었던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잃을게 있다고 보니까,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악착스레 방어(防禦)하려고 하거나 착취(搾取)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유는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아무것도 잃을게 없는 상태로 사는,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갈망하고, 그 갈망한 것을 갖게 되면 행복할거라는 기대에 좀 문제가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겁니다. 이른바 타는 목마름에 어쩔 줄 모르면서, 막상 ‘나’는 그런 시도를 멈추지 못합니다. 기대하던 것을 채워야 자유로우리라는 또 다른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타게 갈망하는 걸 가지게 되는 유일한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냐 하면 갈망하는 것 즉 움켜쥐려는 그 시도 자체를 포기했을 때, 갈망하던 것을 갖게 됩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여러분들한테 선물로 주면 아마 픽!하고 웃을 겁니다. 훌쩍 커버린 어른인 나에겐 이미 필요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장난감은 이제 나에게는 갈망의 대상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영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자꾸 ‘fix’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찾아봤습니다. 흔히 고정(固定)시킨다는 말을 할 때 영어로 fix라고 하지만, 그게 마약(痲藥)주사를 뜻하는 속어(俗語)로 쓰임을 알았습니다. 그거 참 재미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고정됐다란 말이 마약주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기 나름으로는 충실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옆에서 봐서는 그것이 마약중독에 걸린 사람일 수 있다 이겁니다. ‘매일 테니스를 쳐야 해. 안치면 안 돼. 그 재미에 살아.’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요일만 되면 골프채 들고 나가야지만 몸이 풀린다.’는 사람이 있고, ‘새벽안개 보며 낚시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옆에서 보자면 정신병자와 다름없어도 자기는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니, 이게 마약환자지 뭐겠습니까? 고정된 상태에서만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마약에 중독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나’가 있지 않은가 하면서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면, 안 된 말이지만 이는 마약주사를 맞은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바깥의 경계 속에서 부처님을 찾겠다는 마음은, 사실 부처님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뭡니까? 내 상대적인 범주 속에서 자기만족을 추구하겠다는 얘기와 똑같습니다. 상대적인 성취를 향한 상대적인 노력을 했으니까, 그만큼 나에게 보답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절을 일 배(一拜) 올릴 때 3천배 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절 많이 했다는 생각에 빠져있는 한 당신은 일 배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백일기도 했다는 생각을 갖는 한 여러분은 하루도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잘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끝없이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는 ‘나’만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로 항상 부족감을 느낍니다. 바깥에서 부족이 채워지는 걸로 기대 합니다만, 사실 생각해보면 바깥에서 채워질 ‘나’가 처음부터 존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망하는 것을 움켜쥐려고 하는 그 시도를 포기했을 때, 거꾸로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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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
201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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