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석가모니불
성자(聖者)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없는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은 아낍니다. 아직은 자기 자식이라는 그 폭이 다소 좁은 마음이지만, 어쨋든 자기의 육체의 범주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이기심의 극복은 약속됩니다.
이기심을 뽑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이타(利他)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의 삶은 바로 이렇게 이타의 싹을 키워 가고 있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리고 얼마만큼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기약이 없기에, 자칫 소홀해질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면 필요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살의 삶을 여행에 빗대 보면 어떨까요?
흔히 어떤 곳을 향한다고 할 때, 도달해야 하는 구체적인 장소를 상정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도착할 곳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칩니다. 남보다 먼저 그곳에 가야 하기에, 새치기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뻔뻔해질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가기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경주로 여행하려는 어떤 서울사람을 가정해 봅시다.
그는 바쁜 사람입니다. 빨리 다녀오지 않으면 다음 일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고속도로가 막히면 큰일이지요. 그래서 철도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어렵사리 구한 새마을호 표를 손에 쥔 이 사람, 개찰이 시작되자마자 플랫 홈으로 질주합니다. 급한 마음 같아서는 열차 안에서도 뛰고 싶습니다. 역시 열차는 빨랐습니다.
경주역에 도착하자마자 시계를 봄과 동시에 손을 높이 듭니다. 택시를 잡아타면서 큰소리를 내지릅니다.
“불국사로 빨리 갑시다!”
힘들게 낸 시간인 데 기념사진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한 장 두 장 필름에 담기는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먼 훗날을 생각하니, 공연히 흐뭇합니다. 더구나 그 바쁜 와중에 석굴암을 돌아 분황사를 거치면서 반월산성의 전설을 운전기사로부터 듣는 재미를 누가 알겠습니까?
이렇게 바쁘게 다녀 온 이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이 경주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뭘 보고 왔습니까?”
물론 답은 돌아옵니다. 그것도 묻는 사람이 머쓱해 질 정도로 당당하게 말입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사진 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아직 얘기할 게 없네요.”
그럼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경주에 간다고 하는 것은 서울을 떠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따라서 도중에 거치는 곳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름을 알고 있거나 없거나 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나 온갖 자연풍광도 동시에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경주에 가면서 부딪히는 이런 만남을 만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경주에 다녀온 것이 아닙니다. 여행이란 행선지를 떠나기에 앞서서 갖게 되는 설레임으로부터, 돌아올 때 느끼는 아쉬움까지의 모든 과정을 포함합니다. 경주에 다녀왔다는 것은 달랑 경주만 보고 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 거꾸로 경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것도 또한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딘가를 다녀 온 사람은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여행이 끝난 시간과 장소로부터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산다는 게 별스러운 게 아닙니다.
“허공계가 다함이 없기에, 중생계가 다함이 없기에, 중생의 업이 다함이 없기에,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기에”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우리네 삶입니다.
스스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구에게나 끝없는 여행의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삶을 넉넉히 인정할 때, 보살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게 다함이 없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궁극의 목적이 따로 있을 새가 없습니다.
혹시 아직도 달성해야 될 목표나 목적이 과연 따로 실재하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다이아몬드가 워낙 단단하기 때문에 공업용 연마제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럼 다이아몬드는 무엇으로 다듬는가요? 다이아몬드가 그 답입니다. 그럼 부엌칼을 가는 숫돌은 무엇으로 갈까요? 이 또한 숫돌이 답입니다.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곧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미지(未知)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드러난 모습도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살아가야 할 생명의 기회는 무한히 다가오는 법입니다.
지하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첨단의 과학을 동원해도 지진을 막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화산의 폭발을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엄연히 활동하고 있는 데도 눈치 채지 못할 뿐, 그 움직임은 이미 있어 왔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눈과 귀에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한다면, 가당치도 않은 건방진 소리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현상적인 기준에서만 평가하는 데 길들여져 왔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을 모르고 있기나 한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드러나야 할 우리의 생명 내용은 충실하기만 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이와 같은 무한한 삶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지용보살(地涌菩薩)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대지를 가르며 용솟음치는 보살인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궁극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무한성을 생명의 시간과 공간마다에서 증명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 생명의 영역을 스스로 택함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佛界)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미국이 중국과의 핑퐁외교를 통해 수교를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부족한 실정이기에 각 언론기관에서는 취재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시사 주간지 타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특파원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간신히 당시 수상인 주은래와 인터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일화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주은래가 만찬을 열어 특파원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널찍한 상 위에는 온갖 진미가 깔렸는데, 많은 음식 중에서도 통돼지구이는 그날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기분 좋게 식사를 하던 수상이 특파원을 향해 물었습니다.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나요?”
가뜩이나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특파원이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저는 유대교인이라서 돼지고기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주은래는 껄껄 웃으면서,
“중국에선 이것이 돼지고기가 아니고, 오리고기요 오리고기!”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해서, 그 특파원은 이후로 돼지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道)를 행함이니 여래를 능히 뵙지 못하리라(금강경)”
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보살을 설명하면서 삶을 여행에 빗댔던 경우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각자 세계에서 삽니다. 그런데 이 현실이란 게 온갖 고뇌와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 바로 현실이지요. 언뜻 보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지만, 끝내 도달하는 곳은 항상 자신의 지향점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응시로부터 우리의 참다운 면목이 발견됩니다. 그것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곳곳마다 일어나는 일상사인 것이지요. 즉 우리는 현실을 기준으로 해서 진리의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현실에 살면서 새로운 눈으로 진리의 영역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와 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밖에 펼쳐져 있는 현실과 어떻게 공감하는가에 의해서 인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인정하는 현실에서 어떤 자기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가가 열쇠입니다.
만약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능력이 없다, 사주(四柱)가 별 볼 일 없다, 머리가 나쁘다는 등 이미 자신을 규정한 사람이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묘방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지요.
차를 운전하면서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엑셀레이터를 누르는 격입니다.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운전자라면 브레이크를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을 것입니다. 또 그 정도에 따라서 전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따라서 진정으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를 점검할 일입니다.
드디어 부처님이란 말의 뜻을 알아 볼 순서인 것 같군요.
부처님이란 말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붓다라는 인도 말을 소리 나는 대로 따라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붓다 곧 부처란 진리를 깨달으신 분 또는 진리에 눈을 뜬 분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각자(覺者)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와 생명의 근본원리를 완전히 깨달은 분이기에, 조상님 네들이 높여서 부처님이라고 불러온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 각자가 깨달음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은 역사를 뛰어넘는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기원전 5세기경에 인도에 출현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말 그대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역연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된 분입니다. 인간이 만든 온갖 관념이나 이론의 갖가지 덫의 유혹을 과감히 떨치고 현실과 마주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 과연 참되게 사는 길인가를 추구함과 동시에 그 답을 몸과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명내용을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성자(聖者)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없는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은 아낍니다. 아직은 자기 자식이라는 그 폭이 다소 좁은 마음이지만, 어쨋든 자기의 육체의 범주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이기심의 극복은 약속됩니다.
이기심을 뽑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이타(利他)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의 삶은 바로 이렇게 이타의 싹을 키워 가고 있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리고 얼마만큼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기약이 없기에, 자칫 소홀해질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면 필요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살의 삶을 여행에 빗대 보면 어떨까요?
흔히 어떤 곳을 향한다고 할 때, 도달해야 하는 구체적인 장소를 상정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도착할 곳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칩니다. 남보다 먼저 그곳에 가야 하기에, 새치기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뻔뻔해질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가기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경주로 여행하려는 어떤 서울사람을 가정해 봅시다.
그는 바쁜 사람입니다. 빨리 다녀오지 않으면 다음 일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고속도로가 막히면 큰일이지요. 그래서 철도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어렵사리 구한 새마을호 표를 손에 쥔 이 사람, 개찰이 시작되자마자 플랫 홈으로 질주합니다. 급한 마음 같아서는 열차 안에서도 뛰고 싶습니다. 역시 열차는 빨랐습니다.
경주역에 도착하자마자 시계를 봄과 동시에 손을 높이 듭니다. 택시를 잡아타면서 큰소리를 내지릅니다.
“불국사로 빨리 갑시다!”
힘들게 낸 시간인 데 기념사진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한 장 두 장 필름에 담기는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먼 훗날을 생각하니, 공연히 흐뭇합니다. 더구나 그 바쁜 와중에 석굴암을 돌아 분황사를 거치면서 반월산성의 전설을 운전기사로부터 듣는 재미를 누가 알겠습니까?
이렇게 바쁘게 다녀 온 이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이 경주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뭘 보고 왔습니까?”
물론 답은 돌아옵니다. 그것도 묻는 사람이 머쓱해 질 정도로 당당하게 말입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사진 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아직 얘기할 게 없네요.”
그럼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경주에 간다고 하는 것은 서울을 떠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따라서 도중에 거치는 곳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름을 알고 있거나 없거나 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나 온갖 자연풍광도 동시에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경주에 가면서 부딪히는 이런 만남을 만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경주에 다녀온 것이 아닙니다. 여행이란 행선지를 떠나기에 앞서서 갖게 되는 설레임으로부터, 돌아올 때 느끼는 아쉬움까지의 모든 과정을 포함합니다. 경주에 다녀왔다는 것은 달랑 경주만 보고 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 거꾸로 경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것도 또한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딘가를 다녀 온 사람은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여행이 끝난 시간과 장소로부터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산다는 게 별스러운 게 아닙니다.
“허공계가 다함이 없기에, 중생계가 다함이 없기에, 중생의 업이 다함이 없기에,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기에”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우리네 삶입니다.
스스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구에게나 끝없는 여행의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삶을 넉넉히 인정할 때, 보살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게 다함이 없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궁극의 목적이 따로 있을 새가 없습니다.
혹시 아직도 달성해야 될 목표나 목적이 과연 따로 실재하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다이아몬드가 워낙 단단하기 때문에 공업용 연마제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럼 다이아몬드는 무엇으로 다듬는가요? 다이아몬드가 그 답입니다. 그럼 부엌칼을 가는 숫돌은 무엇으로 갈까요? 이 또한 숫돌이 답입니다.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곧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미지(未知)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드러난 모습도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살아가야 할 생명의 기회는 무한히 다가오는 법입니다.
지하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첨단의 과학을 동원해도 지진을 막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화산의 폭발을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엄연히 활동하고 있는 데도 눈치 채지 못할 뿐, 그 움직임은 이미 있어 왔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눈과 귀에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한다면, 가당치도 않은 건방진 소리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현상적인 기준에서만 평가하는 데 길들여져 왔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을 모르고 있기나 한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드러나야 할 우리의 생명 내용은 충실하기만 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이와 같은 무한한 삶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지용보살(地涌菩薩)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대지를 가르며 용솟음치는 보살인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궁극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무한성을 생명의 시간과 공간마다에서 증명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 생명의 영역을 스스로 택함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佛界)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미국이 중국과의 핑퐁외교를 통해 수교를 눈앞에 두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부족한 실정이기에 각 언론기관에서는 취재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시사 주간지 타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특파원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간신히 당시 수상인 주은래와 인터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일화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주은래가 만찬을 열어 특파원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널찍한 상 위에는 온갖 진미가 깔렸는데, 많은 음식 중에서도 통돼지구이는 그날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기분 좋게 식사를 하던 수상이 특파원을 향해 물었습니다.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나요?”
가뜩이나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특파원이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저는 유대교인이라서 돼지고기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주은래는 껄껄 웃으면서,
“중국에선 이것이 돼지고기가 아니고, 오리고기요 오리고기!”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해서, 그 특파원은 이후로 돼지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道)를 행함이니 여래를 능히 뵙지 못하리라(금강경)”
고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보살을 설명하면서 삶을 여행에 빗댔던 경우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각자 세계에서 삽니다. 그런데 이 현실이란 게 온갖 고뇌와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 바로 현실이지요. 언뜻 보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지만, 끝내 도달하는 곳은 항상 자신의 지향점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응시로부터 우리의 참다운 면목이 발견됩니다. 그것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곳곳마다 일어나는 일상사인 것이지요. 즉 우리는 현실을 기준으로 해서 진리의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현실에 살면서 새로운 눈으로 진리의 영역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와 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밖에 펼쳐져 있는 현실과 어떻게 공감하는가에 의해서 인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인정하는 현실에서 어떤 자기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가가 열쇠입니다.
만약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능력이 없다, 사주(四柱)가 별 볼 일 없다, 머리가 나쁘다는 등 이미 자신을 규정한 사람이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묘방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지요.
차를 운전하면서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엑셀레이터를 누르는 격입니다.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운전자라면 브레이크를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을 것입니다. 또 그 정도에 따라서 전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따라서 진정으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를 점검할 일입니다.
드디어 부처님이란 말의 뜻을 알아 볼 순서인 것 같군요.
부처님이란 말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붓다라는 인도 말을 소리 나는 대로 따라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붓다 곧 부처란 진리를 깨달으신 분 또는 진리에 눈을 뜬 분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각자(覺者)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와 생명의 근본원리를 완전히 깨달은 분이기에, 조상님 네들이 높여서 부처님이라고 불러온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 각자가 깨달음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은 역사를 뛰어넘는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기원전 5세기경에 인도에 출현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말 그대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역연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된 분입니다. 인간이 만든 온갖 관념이나 이론의 갖가지 덫의 유혹을 과감히 떨치고 현실과 마주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 과연 참되게 사는 길인가를 추구함과 동시에 그 답을 몸과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부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명내용을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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