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시작이고, 날마다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늙는 걸 두려워한다.” 이런 세네카의 지적과 같이 흔히들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입니다. 반면에 자기의 요구급부와 합당치 않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외면하고 맙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착하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윤리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외면하는 어리석음과 고집스러움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 무조건 오래 살기만 하면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요?
오늘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내일의 삶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올해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 간에 그 나이의 연장선상에서 과거나 미래를 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조금도 성장(成長)하고 있지 않음을 폭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누구나 늙기를 싫어하고 젊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바라는 젊음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아마 팽팽한 피부나 튀어나온 근육과 같은 외면적 형상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연중에 동의하고 있는 이러한 기준 설정의 상대성(相對性)을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무책임한 단정을 너무나 쉽게 내리고 있는 자신에 어안이 벙벙해 집니다.
만약 40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20대는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을 60대와 비교한다면 아직도 새파랗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입니다. 늙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준과 비교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말이 젊음과 늙음의 본래 뜻입니다.
이와 같이 추상적인 관념으로 설명되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삶이 아닙니다.
삶은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생명의 증거를 요구합니다.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는 짐작의 수준이 아닙니다. 순간마다 허튼 마음이 끼어들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즉 우리네 삶은 객관세계의 논리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소위 객관의 세계에서는 비교격(比較格)이 난무합니다.
모든 가치판단이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지배되고 맙니다. 이렇게 세상에 드러난 모습으로서의 나를 어떤 대상이나 사람과 비교했을 떄, 우리네 마음은 나락에 떨어지고 맙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보다 큰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은 보다 많은 사람과, 집이 협소한 사람은 보다 넓은 집의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비참해지겠습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소유들이 한정된 것임을 번연히 알고 있기에, 내 소유의 범주를 벗어난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어쩔 줄 모릅니다.
이렇게 초조감의 지배를 받는 사람에게 안정된 생활이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닥치는 날마다 쫓기는 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다가 올 뿐입니다. 그러니 살맛이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살기는 살되 끝없이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서 또 다시 소유(所有)하여야 할 무엇이 남아 있는 한, 아직은 참된 삶의 주인이라고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소유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답은 간단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생명활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로서 더 이상의 생명활동이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물질의 법칙과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소유란 현재의 삶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더 이상의 생명활동을 하지 않는 고정된 상태이기에, 발생되는 새로움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소유(無所有)는 재물과 같은 물질적인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삶이란 객관적인 실체로서 비교되는 것이 아니기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참생명의 원리로 다가옵니다. 그러니 소유에 따른 수확을 따로 계산할 새가 없을 것이므로, 우리네 삶은 자연히 무소득(無所得)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삶을 일러, 젊다고 하든 늙었다고 하든 끄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오래 산다거나 일찍 죽는다는 말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닫힌 공간과 시간을 염두에 두고 물질을 논할 때 쓰는 말이지, 우리 생명을 재는 잣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살아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절대격(絶對格)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몸이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혹시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잠시라도 변화상(變化相)을 연출하지 않았다면, 감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계속 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 있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 앞의 모습이 죽어왔기에, 계속 살아 왔다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격인 우리의 생명을 비교격으로 한정시키고는, 세상살이를 억지로 자기 식으로 제단하려 하는 경우,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백유경’은 다음과 같은 우화를 통해 우리의 무감각을 일깨웁니다.
옛날 한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이 갖추고 사는 이 부자의 주변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부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에게는 좀 고약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아무데서나 가래침을 마구 뱉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감히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퉤!’하고 뱉는 순간, 주위의 사람들은 서로 질세라 달려들어, 발로 밟아 문지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눈도장이라도 찍어 이득을 취해보겠다는 지원자가 들끓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한 어리석은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는 동작이 굼뜨다 보니 한 번도 부자의 가래침을 문지르는 영광(?)을 가져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요? 이러다가는 아무런 소득도 없겠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는 중대 결심을 합니다. 자기도 한 번쯤은 침을 문질러서 눈도장을 찍으려 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봅니다.
‘남들은 뱉어서 땅에 떨어진 침을 문지르지만, 나는 그들보다 느리다. 그렇다면 침을 뱉는 순간 밟으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작정한 그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부자가 입을 오무려 막 침을 뱉으려 합니다.
‘때는 왔다!’고 쾌재를 부르며, 발을 들어 냅다 올려 차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드디어 해냈음을 기꺼워합니다.
그런데 기쁨을 만끽 하려는 순간, 부자의 역정이 귓전을 때립니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는가 보다’하고, 고개 들어 쳐다보니,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부자가 피를 흘리며 노기등등합니다. 어찌 할거나?
이런 억지는 자신의 생명가치를 다른 무엇인가에 종속시키는데서 발생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앞서다 보면, 될 일도 안 됩니다.
떄를 알지 못하고 곳의 주인이 되지 못하니, 어떻게 제대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남는 것은 그로 인한 괴로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베에토벤의 월광소나타를 연주하는 명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손놀림에는 아무런 억지의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은 단순한 손가락이 아닙니다.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음악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도레미파...’를 하나하나 헤아리며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특정한 음표에만 머물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앞에 두들긴 건반을 포기함과 동시에, 새로운 건반으로 건너뜁니다. 다만 소나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연주자도 청중도 없습니다. 손가락도 건반도 없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며 따로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통 죽음입니다.
그러나 음악은 살아서 울려 퍼집니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되어 만인의 심금을 울립니다.
분명 만물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평등(平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으로서 무한의 인연(因緣)을 지으며 활동하고 있는 한, 무한한 차별(差別)이 현실에서 벌어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도하는바 삶의 다양성들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특정한 모습이나 성질을 삶의 흐름 속에서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직선적인 구도는 삶의 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들은 소유되는 순간 죽음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물론 당신은 날마다 살고 싶겠지요?
그렇다면 바라는 바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날마다 무소유로 시작하고, 날마다 무소득으로 마감하는 삶으로....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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