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금강경에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으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래, 네가 그런 마음을 일으켰다면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항복이란 바로 ‘나는 중생이오.’ 하는 것을 항복받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나는 중생이오.’ 하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중생이란 유한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나에게 한정이 있다, 나에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런 생각이 나오거든 지체 없이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서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중생을 다 성불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처음에 여쭈어볼 때는 ‘내가 부처 되겠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으니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잘 간직해서 부처가 될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하면 망령스런 마음이 날 적에 그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부처 되는 것에 대해 얘기해 주셔야 할 텐데, 부처님께서는 남들을 다 부처 되도록 하는 쪽으로 마음을 쓰라고 대답하십니다.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그저 끊임없이 성불시키겠다는 그것만이 너의 원(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부처생명을 살고 있으니 새삼스레 부처 될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참선이 아니면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참선에서는 이제 내가 새삼스레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참선하고 앉아서 왔다 갔다 하는 이놈이 ‘이 뭣고?’ 합니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모르기 때문에 알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레 내가 알아내지 않더라도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믿게 되면,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깨친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본래 부처생명을 살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삼스레 완성시켜야 할 부처라는 것도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내가 부처 되어야겠다는 새삼스런 생각을 가질 것 없이, 남들 부처 되도록 해주는데 대해서만 생각하라는 것이죠.
어째서 그렇습니까?
내가 본래 한정이 없는 무한능력자라 그렇습니다.
우리 누차 공부했지만 중생이 부처 되는 게 아니라 부처가 부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양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 아니라 원력(願力)입니다. 중생을 모두 남김없이 부처 되게 해주시겠다는 원(願), 그것 말고는 부처님이 없습니다.
정리하면 부처님께서는
“부처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부처노릇 하렴. 네가 본래 부처니까.”
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노릇인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부처란 모든 중생을 다 부처 만들겠다는 원이므로 그 자체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살겠다는 원을 새기기 위해서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염불(念佛)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는
“법에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항상 주는 마음으로만 살아가거라’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금강경을 통해서 내가 성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성불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또 내가 뭘 받으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남들한테 항상 주는 마음으로 산다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즉 보살 - 부처님 전에 발심(發心)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 - 은 이 세상사람 전부를 부처 만들겠다는 마음과 끊임없이 남들한테 주는 마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나도 부처가 되어야겠는데 왜 나 부처 되는 건 놔두고 남들을 부처 되게 해 주라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 주머니에 채워야 할 것이 많아서 남한테 받아야 되는데, 남으로부터 받을 생각은 말고 주라고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 불교의 근본이 있습니다.
“넌 본래부터 무한이야.”
이것이 위 의문의 답입니다.
본래부터 무한능력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현행원품 본문에 나오듯이 시방세계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세계의 티끌 수 같은 겁 동안에, 계속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할 수 없는 공덕의 그 주인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바로 무한공덕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새삼스레 부처가 될 것도 없고, 남에게 받아야 될 것도 없이 그냥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받으려고 할 뿐,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는 중생이오.’ 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뭘 받으려고 하거나,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나면 얼른 나무아미타불로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아이쿠, 나 이렇게 주고 나면 굶어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 역시 나를 한정짓고, 나를 유한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도 그 마음을 얼른 항복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중생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마음이 떠오를 때, 나무아미타불로 그 마음을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무한밖에 없습니다.
무한이란 아무리 남한테 주어도, 아무리 큰 숫자를 빼도 무한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남들한테 베풀어도 조금도 손실이 없는 것이 우리 참생명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믿었을 때만 가능한 얘기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법문들으신 소감,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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