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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문사수 2009.11.28 조회 수 26529 추천 수 0

혜능대사의 삼귀의 해석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兩足尊)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離欲尊)께 귀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衆中尊)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 하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佛]란 깨달음이요,
법(法)이란 바름이며,
승(僧)이란 깨끗함이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고 할진대는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 성품에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 六祖 慧能 -


혜능대사의 삼귀의에 대한 해석을 공부해보겠습니다.
혜능대사는 당신의 제자를 보고 부르실 적에 ‘선지식아’ 하고 부르십니다.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생님’과 같은 뜻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나를 번뇌망상에서 떠나게 해서 열반의 세계에 들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분을 말하는 것이지요.
법우님들도 혹 가르치는 입장에 섰을 때 배우는 사람에게 ‘너는 못난이고 나는 잘났으니까 가르쳐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 뜻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의 양족존(兩足尊)께 귀의하오며[歸依佛 兩足尊]

깨달음이란 바로 부처[佛]를 말합니다.
혜능대사는 부처란 말을 깨달음[覺]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종로3가에 가면 대각사(大覺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대각사를 일으키신 어른이 삼일 운동 당시에 33인 중에 한 분인 백용성스님입니다. 이분이 가만히 보니까 불교가 잘못되어가고 있어서 바로잡아야겠는데, 불교라고 하면 무당 가르침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려서 대각교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랬더니 '미신은 아니구나'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그랬다가 당신 자신이 조계종이니까 결국 불교에 편입시켜서 대각사가 된 것입니다.
불교란 말이 그렇게까지 오해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부처님을 나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또한 스님이라는 말도 부처님께 특별히 청을 드려서 나에게 복이 오도록 해주시는 분으로 압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스님들을 보고 무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스님들 자신이 무당 행세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남의 복을 빌어주고 대학 합격을 빌어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가 이렇게 오해를 받도록 되어 있어서 이름을 대각교라고 고쳐야할 필요가 있을 정도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늘 공부하듯이 내 밖에 따로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깨달음의 양족존이란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 두 가지를 모두 구족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엔 부처님 말고도 지혜가 밝은 성인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분들에게는복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밝은 공자님도 당신의 뜻을 펴지 못했고, 예수님도 지혜가 밝았지만 불행하게 서른세 살에 그렇게 무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도 마지막에는 독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지혜가 있었다는 데는 장점이 있었지만 복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을 모두 구족하셨습니다.

바름의 이욕존(離欲尊)께 귀의하오며[歸依正 離欲尊]
 
법(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바른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본래부터 절대무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진리가 바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이 절대무한생명,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는 내가 새삼스럽게 욕심을 내서 뭘 더 붙여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어떤 것을 덧붙여서 부족한 것을 보충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만족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모든 욕심을 여의겠다[離欲尊]는 뜻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이 미워지기도 하고 남들과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여의는 것이 본래 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돌아가는 가장 첩경입니다.

깨끗함의 중중존(衆中尊)께 귀의합니다[歸依淨 衆中尊]

깨끗함[淨]이란 순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순수생명은 부처님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순수생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 부처생명을 살고 있으니까 당연히 부처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처노릇을 하지 못하고 중생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참생명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짜 생명 앞에 굴복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순수생명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깨끗함입니다. 즉, 내 안에 있는 순수생명을 실현시키겠다는 거룩한 의지가 바로 승(僧)입니다.
내 밖에 있는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함, 내 참생명의 순수성을 그대로 발휘하겠다는 그 마음이 내 중생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衆中尊]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귀중한 것이 있다면 바로 내 참생명인 부처님생명, 순수생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입니다.
그 의지야말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보다 가장 높은 것이지요.

이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의지한다는 말을 정리해 봅시다.
부처님[佛]이란 나의 참생명이고, 법(法)이란 그 참생명을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욕심을 여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방법을 알았으면 이것을 꼭 실천해서 실현시키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승(僧)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 밖의 누구에게 귀의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음 문장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

부처님은 어디 계시나요?
내 안에 계십니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만을 스승으로 삼습니다.
삿되고 미혹한 외도라는 것은 조물주가 있어서 우리를 만들어 줬다고 생각한다거나, 운명의 지배를 받는 사주팔자가 있어서 부적을 해야 한다거나, 또 불교라고 하면서도 우리 절 부처님만 특별히 영험하다고 하는 것이 모두 삿되고 미혹한 외도입니다. 또한 머리 깎았으니 무조건 신도들에게 존경받아야겠다고 하는 것도 삿되고 미혹한 외도입니다.
외도란 내 밖에 진리가 있고 내 밖에 의지처가 있어서 밖으로 찾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불교신자라고 하면서도 알고 보면 외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떤 절에 가서 기도하면 대학에 들어간다든지, 한 가지 소원은 꼭 성취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모두 외도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이 육조 혜능대사가 우리에게 주신 불법승 삼보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확실히 결론 내려줍니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불이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라’

즉, 부처님은 도깨비나 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치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절을 한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법이란 바로 내 생명의 원리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법에 의지한다는 것 또한 글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리에 어긋나게 살았던 것을 청산하고 생명의 원리대로 살아서 내 참생명을 완성시키겠다는 마음가짐이 승입니다.

우리들이 본래 부처생명을 살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중생스러운 생각을 자꾸 일으킵니다.
이것이 번뇌망상인데, 번뇌망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순수한 건 아닙니다.
순수생명은 부처님생명입니다.
때문에 번뇌망상이 있거나 말거나 문제삼지 말고 참생명을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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