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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법문

진리로 피어나는 삶

문사수 3 일 전 조회 수 16 추천 수 0

변화의 주체로 살아가기

 

법문 여여(如如)법사

 

나이란 게 도대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예순 살이 되어 늙었다고 하는가 하면, ‘이 나이가 되니, 인생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제부터 보람차게 살아야지.’ 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어느 노인이 연세가 얼마나 됩니까?” 하는 질문을 받자, “나는 반() 살았소.” 하더랍니다.

()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팔십일(八十一)이 되니까, 그 속내는 162세를 살겠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들의 어릴 때 제일 큰 소원 중의 하나가,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놀이 다 해보고, 과자도 실컷 먹고, 자장면도 실컷 사 먹고 하는 등등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른으로 불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과연 행복합니까?

그리고 또 몇 살부터를 어른이라고 합니까?

조금만 따져보면 이렇게 추상적인 것도 없습니다.

이와같이 받아들인 만큼 자리매김하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재하는 게 아닌 데도, 곧잘 특정한 모습의 삶으로 스스로 고정합니다.

그리고 한정된 테두리 속에 갇혀서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몇 살이야.’, ‘지난날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았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 한창때일 젊은이가, ‘이제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골방에 틀어박히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스무 살에 죽어서 예순 살에 묻힌다.’는 옛말이 유효한 게 분명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 활동을 스무 살에 정지시킵니다.

그러고 나서 언제나 왕년(往年)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그러니 지금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결국, 이렇게 막상 마음만 앞서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전혀 뛰어들지 않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와 불안만 첩첩이 쌓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나는 더 이상 성장하기 싫다.’고 포기한 사람 스스로 택한 정황인데,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런데 조선조 영조 때의 김천택은 이런 시조를 지어서 우리를 일깨웁니다.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寸陰)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구구절절이 옳은 말입니다.

잘 나간다고 생각되면, 주위와 인간적인 교류도 끊고 자기발전을 위한 더 이상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복()으로 내가 사는 데 보태 준 게 있느냐는 식으로, 저 혼자 곶감 빼먹듯이 시간이나 죽이면서 먹고 자고 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지겨운 일도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무엇인가를 시도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신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미리 포기하고 마는 경우 또한 참으로 많습니다.

그건 내 전공이 아니라서’, ‘한 번도 이런 업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주변의 사람들도 그런 일을 하다가 다 실패했는데하는 식으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우습게 아는데, 누가 이런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겠습니까?

다들 나름대로 바쁘게 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항상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즈음 변해야 산다.’는 구호를 내세우는 기업이 많은데, 그것은 기업이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구호 이상의 효과가 있지 못합니다.

변화해야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가 현상계의 진실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변화할 수밖에 없는 주체가 되었을 때 사는 것이지, 억지로 변하려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닙니다.

시류(時流)에 따라서 변하려고 한다면 이미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그 주체가 바로 우리의 참된 생명자리입니다.

내가 나 다울 수 있는 것은 변화의 주체로 자리할 때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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