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공포로부터의 해방

문사수 2014.06.17 조회 수 28009 추천 수 0

 불교를 보통 정의하기를 ‘부처되는 종교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부처되는 종교라는 말이 아주 희망적으로 들립니다. ‘너는 중생이니까 어쩔 수 없어.’ 라고 내버려두는 종교가 아니라, ‘너는 아직 깨치지 못해서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는 꼭 부처 되고 만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것만 가지고도 상당히 희망적인 얘기가 아니겠어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주나 관상 보러 다니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사주보고 관상 보러 가는 마음은 이미 나는 사주나 관상에 지배 받는, 운명에 지배받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겁니다. 스스로를 한정지으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자신을 무엇으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나무란 말은 귀명(歸命),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의지하느냐? 참생명의 세계 즉 아미타의 세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미타의 세계에 의지해서 사는 생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말이지요.
 생각해보면 참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반야심경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라고 했습니다. 보리살타, 즉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걸림이 없다는 말은 장애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유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구속도 받지 않습니다. 운명이라든지 사주팔자라든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는 절대자유의 주체라는 겁니다.
 절대자유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이루어집니다. 반야는 부처님의 깨치신 안목인데 그 안목으로 보니까 우리 모두는 본래부터 바라밀다의 세계에 이미 살고 있다는 겁니다. 바라밀다의 세계는 절대무한의 세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극락세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성취된 세계입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어디로 찾아가야 할 세계가 아닙니다.

 앞에서 ‘불교는 부처되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아직 부처가 아니고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 데 과연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될 것인가 라는 확실성이 없기에 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게 되면 이미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앞으로 부처될 것이다.’ 가 아닙니다. 여러분들 아주 확실하게 아셔야 합니다. ‘앞으로 부처될 것이다.’ 가 아니고 ‘이미 부처’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서 이미 부처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사주팔자를 묻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불교는 그런 것들을 모두 다 부정해 버립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에 아무런 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7년 전에 어떤 법우님이 간암에 걸렸습니다. 그때 의사가 얘기하기를 아주 잘 다스리면 한 2년은 더 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법우는 내 참생명은 본래부터  무한절대생명이니까 간암에 걸려서 죽는다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강경 독송하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독송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가끔 만나겠지만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볼 때 의사가 뭐라고 선언을 했다고 해도 그것에 우리가 지배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지배를 받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듯 종교라고 하는 것은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가는 이유는 절대자유를 얻기 위해서죠. 절대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겁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바로 절대자유의 주체로서 내가 확립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고 걸림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분명 불교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절대무한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반야바라밀을 믿고 있는 사람이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여러 가지 다른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공포심을 일으키는 말을 누가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와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합니다.
시무외자라는 말은 ‘두려움을 없게 해주시는 분’ 이라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름표를 붙인 분이 따로 계셔서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에 의지하게 되면, 다시 말해서 이미 절대무한생명을 살고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모든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두려움도 여러분들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시무외자! 이것은 불교의 대표적 상징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공포심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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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쏙
2014.07.19
공포는 공포가 아니고 그 이름이 공포일뿐입니다.
한낱 이름에 떨지 않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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