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을 선택하시다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인간이 아니면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고 헤매고 있는 모습 속에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인간의 몸을 받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유컨대, 아름다운 연꽃이 피기 위해서는 진흙으로 상징되는 더러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의 더러움이란 끝없이 현상을 쫓으며 헤매고 번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는 내 생명의 완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연꽃을 좋아하려면 더러운 진흙도 함께 좋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인도라는 척박한 땅에 태어나신 이유이며,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입니다.
경전에 ‘부모간택(父母揀擇)’이라는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부모를 분간하여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내 아이들이 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들에 의해 선택되어졌고, 그러한 부모들 또한 각자의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부모를 간택한다고 했을 때,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어서 그 ‘나’가 부모를 간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간택하는 업력(業力)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父)와 모(母)와 전생(前生)이 합쳐지지 않고는 ‘나’라는 존재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원리(原理)에 따라서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는 곧 부모가 낳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인연이 그런 모습으로 드러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간이라도 각각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과 그 생명이 만나는 때가 다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를 간택하는 것은 세상을 간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내 삶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갈등은 내가 해결해야 할 갈등이며, 나에게는 그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분단 현실의 한반도에 태어났다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그때마다 자기가 머무를 장소와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선택하게 되며, 그 생명이 어떤 조건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러한 환경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로써 오늘의 나는 전생으로부터의 모든 축적된 역량에 의해 만들었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전생이 화려했느냐 추했느냐를 따질 것도 없으며, 원망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이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고난의 현실에 태어나신 것은 그 현실을 해결하기 위함이지, 힘든 현실에 짓눌려 쫓겨 다니거나 비겁하게 외면하며 살려고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뿐만 아닙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생명이 스스로 선택한 것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로부터 참된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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