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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법회法會인가?

문사수 2012.02.06 조회 수 31313 추천 수 0

왜 법회法會인가?

현상적인 측정치를 통해 삶의 본질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정각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를 만나도 반갑고 기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귀한 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시고자 내려오신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정각산에서 내려오실 때 가장 먼저 우파카라는 고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파카는 아지비카교(敎)라는 고행을 중히 여기는 일파에 소속된 수행자인데, 환히 빛나는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나는 부처이다. 내게 스승은 없으며, 또한 내게 견줄 만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는 부처가 출현할 것이라는 믿음은 그 당시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미 보편적인 정서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스스로 부처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우파카는 심드렁하게 “그럴지도 모르지요.”라고 말하고는 다른 길로 가버렸습니다. 속으로는 ‘별 미친 사람 다보겠네.’하며 욕을 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파카에게 있어서 나름대로 생각한 부처님에 대한 이미지(想)가 있었을 것입니다. 눈앞에 나타난 부처님이 그 기준에 맞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부처임을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여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현상적으로 측정 가능한 범주에서 사물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른바 객관적인 자료라고 하는 것에 너무나도 쉽게 권위를 부여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겉모습이나 화려한 경력,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성을 쫓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상대적 평가 기준에 목을 매는 한, 우리도 얼마든지 우파카의 경우와 같은 어이없는 정황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첫 제자는 수행자 싯달타와 함께 극심한 고행을 하던 다섯 명의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들입니다. 본래 이들은 고행을 버린 싯달타에게 타락했다고 비난하며 욕했던 사람들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전법(傳法)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부처를 이루신 보드가야에서 다섯 비구가 머물고 있던 바라나시까지는 2백 킬로미터가 넘습니다. 맨발로 열사의 땅 인도를 걸어서, 게다가 부처님을 환영하지도 않는 다섯 사람을 향하여… 이것이 불교의 시작입니다.
전법은 결코 나를 반기는 사람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화내고 비웃고, 언제든지 등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꺼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경전에서는 ‘청하지 않은 벗에게 청하지 않은 법을 설한다[不請之友 不請之法].’고 하십니다.
청하지 않은 벗이자 청하지 않은 법이라는 것은 결코 ‘나’라는 기준에서 불법(佛法)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몸뚱이 갖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몸뚱이는 끝내 우리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고 할 때 처음부터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돈, 명예, 건강 따위의 상대적인 가치관은 결코 믿고 의지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법회(法會)는 이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불교신앙의 목적이 성불(成佛)이라고 할 때, 중생이 노력해서 부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본래 부처가 부처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상대적 가치관을 좇는 중생노릇은 그만두고 부처노릇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것이 전법입니다. 즉, 전법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법우께서는 “전법(傳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분들에게 대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법에 특별한 테크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연 짓는 모든 분들에 대하여 본래 그 분들의 생명가치 그대로 부처님으로 모시는 것이 전법입니다.
한마디로 부처님 모시기 운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부처님 모시기 운동을 해야 할까?
그것이 부처님께서 부처님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이신 이유는 만나는 모든 분을 부처님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중생으로 봤다면 그 분은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법회는 부처님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자리한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우(法友)라 불리는 발심(發心)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렇게 모여든 법우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생기게 됩니다. 먼저 공부한 사람이 중심에 서게 되는데, 이런 사람을 일러 법사(法師)라 부르는 것입니다. 법사는 결코 성직자(聖職者)가 아닙니다. 불교는 성직자가 없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는 오로지 구도자(求道者)만 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법우는 구도자로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구도자에게 있어서 어제의 이력(履歷)은 중요치 않습니다. 나이라든가 남녀와 같은 조건도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오늘 발심(發心)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제 발심했다고 해서 오늘 발심한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또한 오늘의 발심이 내일의 발심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오직 지 부처님 모실 준비가 되어있는지가 구도자에게 있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法華經)》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래사(如來使)여,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라!”
이처럼 부처님(如來)의 심부름꾼(使)인 법우(法友)는 부처로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또한 부처님 모시는 삶이기에,  진정한 부처님생명의 근원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게 됩니다.
그럼 이러한 삶을 어디에서 실현할 수 있는가?
이미 답은 나와있습니다. 법회입니다.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새날맞이부처님P1170704.JPG 

2개의 댓글

Profile
미산
2012.02.07
On Line으로 법문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함이 일상화 되어지기를 발원하며...
Profile
산들바람
2012.02.08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심부름 잘해보겠습니다.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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