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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해야 할 중생은 없다

문사수 2011.11.13 조회 수 27280 추천 수 0

차별해야 할 중생은 없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 전에 의지한다는 것이고, 이 말은 부처님의 뜻을 따라 부처님을 시봉(侍奉)하며, 부처님의 뜻이 우리가 사는 나라에 남김없이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란 분이 특별한 모양을 가지고,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하게 살아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많이 공부했습니다. 부처님은 온 천지의 근본 생명을 말하기 때문에, 사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부처님과 대립된 중생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겉껍데기에 속고 있기 때문에 중생세계로 보이는 것이지, 겉껍데기를 무시하고 나면 세상사람 모두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는 본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따르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을 시봉하며 부처님의 뜻이 이 땅에 두루 퍼지도록 바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내 이웃을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 없이 공양하고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불교는 절대 평등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평등의 세계라는 것이 부처님과 내 앞에 사기꾼으로 나타난 이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온 천지에 본래 부처님생명밖에 없기 때문이며, 우리들의 참생명 역시 본래 부처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참생명은 결코 육신 속에 갇혀 있는 한계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에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한광명(無限光明)이고 또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에 무한생명(無限生命), 즉 아미타(阿彌陀)입니다. 아미타생명만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따라서 아미타생명이 아닌 중생이 따로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미타생명 아닌 다른 중생이 보인다는 것은, 그런 중생이 참으로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참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 눈을 가지고 중생처럼 본 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우린 나무아미타불을 배웁니다. ‘나무(南無)’로 일체 모든 차별세계를 부정해 버립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것, 내 마음에 헤아려지는 차별세계를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일체 모든 차별 세계를 부정해서 본래 한생명을 살고 있는 아미타세계로 들어갑니다.
나무아미타불이 어떤 특별한 주문이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새삼스럽게 내 밖의 환경이 바뀐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로 내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바뀜으로써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되고, 이 세상 보는 눈이 바뀜으로써 이 세상 온천지가 아미타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무아미타불이라야 우리들을 참생명의 세계로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이런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어디에도 내가 차별해야 할 중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공경하고 부처님 전에 끝없는 공양을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고 공양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옛날에 누더기를 입고, 얼른 보면 거지같이 보이는 그런 생활을 하신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분께 어느 대감이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49재 법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자고 해도
 “어디 거지가 와서 이러느냐? 오늘 큰스님께서 오시는 날이라 이렇게 경비를 서고 있는데, 너 같은 거지가 어딜 감히 들어오려 하느냐?”
고 합니다. 사실은 그분을 기다리는 것인데, 옷이 지저분하니 못 알아 보는 거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동네 가까운 절에 가서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갈아입고 가니까, 그제야 큰스님 어서 오시라고 환영을 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일주문에 들어서시며 옷을 벗으셨답니다.
 “아니 스님, 법당에도 안 들어가시고 왜 옷을 벗으십니까?”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옷이야. 아까 내가 거지 옷을 입고 왔을 때는 내쫓고, 지금 좋은 옷을 입고 오니까 환영하는 걸 보니까, 당신네가 모시자는 것은 이 옷이야.”

  그래서 옛날부터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못 입은 거지는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가 되어버렸는데, 겉으로 나타난 모양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우리들 마음을 다스리라고 이런 법문이 나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다 평등하게 받들어 모신다는 거죠.

  겉모양에 속지 않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했으니까 밝아져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이 사업 잘하고, 공부 잘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이 세상 모두를 다 부처님생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생명으로 보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는 겉모양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등한 마음을 가지려면 지혜가 밝아서 겉모양에 속지 않고 참생명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게 평등하게 보게 되면, 나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언동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재수 없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나의 인생의 가치를 높여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수마노탑.JPG

적멸보궁 정암사의 수마노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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