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법을 청한다는 것은

문사수 2011.06.10 조회 수 24369 추천 수 0

법을 청한다는 것은

 열반경(涅槃經)에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 깎고 승복 입으면 좋은 법문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만, 불교는 그렇게 겉모습으로 판단되는 어떤 특정 신분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불교(佛敎)는 신분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거사는 스님도 아니고 법사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설해주신 내용이 얼마나 위대한 법문입니까? 그분이 말씀해주신 것에 경(經)이라고 붙여서 유마경(維摩經)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법에 의지하는 것이지 사람에 의지하는 게 아닙니다. 설령 미친 사람이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법문으로 받아들여 진실임을 인정하면 그 사람이 법사가 되는 것이지요.
  법화경에 제바달다 얘기가 나옵니다. 법우님들도 제바달다를 아시지요? 부처님을 욕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처님이 하시려는 일을 반대한 사람이니, 흔히 하는 말로 부처님의 적(敵)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한번도 제바달다를 적이라고 얘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바달다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일찍 얻을 수 있었다고 하십니다. 제자가 그 말씀을 듣고 여쭈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내가 전생(前生)에 임금 노릇할 적에 대승경전을 공부하고 싶어서 포교령을 내렸다.
 ‘누구라도 나에게 대승경전을 설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나라를 버리고 가서 그 사람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법문 설해줄 분 나와주십시오.
  이 포교령을 보고 어떤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내가 제바달다란 사람인데 내가 법문을 할 것이니 내 제자 되거라’ 해서 임금자리를 내버리고 산 속으로 쫓아갔더니라.
  그런데 이 제바달다가 어찌나 거만한지 ‘나 배고프니까 밥 좀 지어라’ 해서 밥을 짓고, 자기가 앉아야 하겠는데 앉을 자리가 없다고 나를 엎드리게 하고, 그 등위에 앉아서 밥을 먹으며 나를 쉬지 못하게 했다. 그렇더라도 대승경전을 듣겠다는 그런 열의 때문에 조금도 스승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얘기지요.
  밥하고 물 떠오라는 것까지는 혹시 모르더라도 ‘다리가 아파서 앉아야겠는데 앉을 자리가 없구나, 네가 좀 엎드려라’ 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엎드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심(下心)하면서 대승경전을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제바달다야 말로 참으로 고마운 은인이지 원수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을 설해주시는 그 법사 앞에 모든 걸 바치겠다는 마음이 없이는 법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렇게 되려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상의 청법(請法)이 없습니다.
  나무(南無)! 해서 나 잘났다는 마음을 다 내버리는 것이죠.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잘났습니다. 나는 아는 것이 많습니다. 나는 경험이 풍부합니다.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훌륭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마음을 다 내버리는 게< 나무>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의 참생명인 부처님생명, 본래 아미타(阿彌陀)라는 것이 드러나는 동시에, 내 주변은 온통 아미타불(阿彌陀佛)로 꽉 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부르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누구 얘기를 들어도 전부 법문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이상 가는 청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나무아미타불 했을 적에 새삼스레 좋은 세상을 구할 것도 없이 본래부터 완벽한, 본래부터 영광스럽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법문 듣는 것 이상 귀한 것이 없고, 동시에 남들에게도 법문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으로 법당도 갖추고, 법회를 운영하는 것이지요.
  법을 청하는 것이 그저 법사(法師) 앞에 앉아서 ‘법을 설해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법회가 있는 날에는 법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오시는 분들이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을 펴는 일을 하며, 법회 운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법문을 듣겠다는 마음 자세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법문을 설해주시는 분을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합니다. 즉, 언제나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 선지식입니다. 선지식을 다른 말로 좋은 벗[善友]이라고 합니다. 관무량수경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누구라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겠노라”
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이 관세음보살이 내 친구가 되어있습니다. 친구가 되어서 나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집안의 내외가 같이 불법(佛法)을 공부한다면, 남편에게 있어 아내가 선지식이고, 아내에게 있어 남편이 선지식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자식이 선지식일 수 있고, 동생이 선지식일 수 있고, 아주 갓난쟁이가 선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사람 누구든지 선지식으로 볼 수 있을만한 마음자세를 갖게 되면, 항상 법문 듣는 자세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무아미타불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야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내 눈앞에 나타나 주시는 것이 염불삼매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 무량수경에 나오듯이 염불하는 중생은 부처님이 내버리지 않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만이 꽉 차 있는 사회가 열리기 때문에, 내버릴 부처님도 없고 부처님에 의해서 내버릴 나도 없이, 온 천지가 그대로 부처님으로 꽉 차있는 그런 세계가 내 앞에 전개되는 것이지요.
  그런 세계가 전개되려면 언제나 법을 듣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갈 적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법문을 듣고서는 그 법문으로 나를 비춰봐야 합니다. 나를 비춰보지 않으면 그것은 법문이 아닙니다. 이렇게 비춰봐서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삐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자꾸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삶의 방식을 수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사수(聞思修)입니다.
  문사수의 생명, 그것은 바로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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