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듣기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

문사수 2011.03.20 조회 수 27280 추천 수 0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

이탈리아의 어떤 수학자가 ‘미남·미녀는 타인의 행복권(幸福權)을 침해하고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미남·미녀는 타인의 행복권(幸福權)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의 상대성(相對性)을 시사합니다. 시대나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부분적인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전혀 반대인 평가(評價)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삶이란 세상의 어떤 평가에 앞서서 그냥 살아간다는 데 묘미가 있을 뿐입니다. 사건과 사물을 대상으로 측정과 분석을 한 결과를 가지고 평가의 잣대를 휘두르는 동안, 유일한 기회(機會)는 사라지고 맙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고 설령 그러고자 해도 결코 반복할 수 없는 삶의 기회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관계(關係)에 있어서도 의무(義務)를 내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눈앞에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 나에게 부모님이 오셨구나!” 하면서 자식 노릇을 할 따름입니다. 자식 노릇을 할 기회만 있는 것이지, 자식으로서의 의무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친구가 도움을 청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지. 나에게 친구가 왔구나!” 하면서 친구 노릇을 할 뿐입니다. 친구 노릇을 할 기회만 있는 것이지, 친구로서의 의무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친구로서 뭘 할까?’가 아닙니다. 친구 노릇을 할 유일한 기회를 맞고 있을 뿐입니다.
일일이 모두 예를 들지 않아도 결론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그냥 기회로 알고, 아는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왜 따로 대비(對備)를 해야 됩니까? 언제 어느 곳이나 소중한 시간과 공간입니다. 삶이 전개되는 순간마다가 그야말로 기회입니다. 지난날이나 다가올 날들과 비교하며 망설일 새가 없습니다. 
자식을 내치거나 부모를 모른척하란 얘기가 아닙니다. 나에게 어머니로 오시고, 내 아들로 만나는 유일한 기회로 맞을 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형제들이 아무도 모시지 않으니, 나라도 어머니를 모시는 게 자식의 의무 아니겠는가?’한다든가, ‘낳은 자식이니, 어쩔 수 없이 키워야 하지 않겠나?’하는 식의 삶은 온통 거짓투성이일 따름입니다.
의무를 염두에 둔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함정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의무를 다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측정과 그에 따르는 평가로 인한 보상(報償)심리의 발동입니다. 그 또는 그녀를 물질로 대하지 않으면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관계를 생명이 아닌 물질로 만나는 관계이기에, 자신마저 펄떡이는 생명이 아닌 물질로 고정하고 맙니다. 그래서 의무를 앞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대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염불법문(念佛法門)을 만나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알게 된 염불행자(念佛行者)들입니다. 소리를 내거나 속으로 하거나간에 염불을 중단치 않으며, 살려지는 은혜를 갚기에 여념이 없는 법우들입니다.
이렇게 나로부터 그리고 나에게로 모아지는 염불의 공덕을 그리며, 염주(念珠)를 돌리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끝없는 집착에 따르는 탐욕의 불길에 휩싸여 움켜쥐려고만 하는 그 손으로 염주를 돌립니다. 부처님생명의 사리를 감싸는 듯, 감사와 찬탄은 뭉게구름 피어오르듯 하염없이 솟아납니다.
어느 결에 돌리는 손과 잡히는 염주가 사라지고 맙니다. 끝없이 크고 넓은 허공(虛空)으로 줄로 삼아 천지간을 두루 꿰니, 세상 그대로가 다만 오직 염불로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허공 속을 서서 돌아다니면 사람이라고 합니다. 허공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사는 공간이 있으면 건물이라고 합니다. 허공 속에 이뤄놓은 것이 있으면 업적(業績)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허공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막연함으로 가득하지만, 그렇게 도저히 있다고 할 수 없다가도 세상을 모두 담고도 항상 넉넉합니다. 그런가하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微細)한 세포 속에도 허공은 자리합니다. 이런 면에서 허공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없으면서 있는 것이 허공입니다. 그런 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는 것들을 두루 뀁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면서, 가진 자는 뺏기지 않으려고 못가진 자는 뺏으려고 치고받기에 여념이 없는 투쟁의 결과물들은 허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무소불이의 권위도 허공에 핀 아지랑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자기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씨줄과 날줄 삼아, 유한(有限)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나 지식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넘치고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딱합니다. 그러다가 그렇게나 믿었던 그 줄이 “탁!”하고 끊어지고 나면, 어떻게 살려는지 안쓰럽기만 합니다. 

염주가 끊어진 적이 있습니까?
무척이나 황당합니다. 돌리는 동안 그것이 끊기리라는 생각을 눈꼽만치라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루룩 흘러내리는 알들이 천지사방으로 튀깁니다. 어느 것부터 주워야 할 지 일순 넋을 놓게 됩니다. 
염불에도 목적(目的)이 있어서, 복(福)을 받아 건강해지고 돈이 넘치거나 출세가 약속되기 때문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상태가 허공으로 줄을 삼아 두루 꿰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벌어지는 결과이지, 추구하는 목적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이라는, 삶의 근원으로부터 말미암은 생명관(生命觀)을 유지하면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회향(回向)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 그대로 시공(時空)의 주인 되서 사는 것이 염불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염불을 삶의 원인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인연이나 소중할 뿐입니다.
어떤 생명도 부처님생명으로 다가오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하였듯이, 삶에는 의무(義務)가 아닌 기회(機會)만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제 염불행자인 법우는 더 이상 의무를 짊어지려고 하지 맙시다. 의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허공으로 줄을 삼아 두루 꿰어서, 부처님생명으로 만나 부처님생명으로 회향할 기회만이 있기에….

                                                                                                                          <문사수법회 여여법사님 법문>

0개의 댓글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대중법문] [종료 : 4월, 넷째주 대중법회] 생사해탈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 - 범열 법사 문사수 2023.02.12 2452
의무로 살지 맙시다 2 문사수 2010.10.28 27336
오직 만족으로 오신 부처님 문사수 2011.05.04 27309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 문사수 2011.03.20 27280
차별해야 할 중생은 없다 문사수 2011.11.13 27280
[부처님일대기] 항마성도상(2) 문사수 2013.04.12 27268
깨침의 의미, 믿음의 공덕 1 문사수 2011.05.25 27258
부족감에서 벗어나려면 1 문사수 2010.04.21 27253
우리가 사바세계에 온 이유 문사수 2011.10.20 27225
삶이란 선택하는 것 문사수 2013.09.16 27200
‘운수행각(雲水行脚)하라!’ 문사수 2012.03.13 27198
[정토예불문4] 가치를 가치답게 모신다 문사수 2014.02.17 27183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1 문사수 2010.05.18 27164
‘나-너’ 대립으로는 진정한 행복 못 누려 [무량수경15] 문사수 2011.06.14 27156
주제를 알라는 말의 속뜻 문사수 2011.08.30 27129
독기 품고 겉으로 참는 것은 거짓된 치장 [무량수경9] 문사수 2011.02.19 27114
죽음의 순간에 염불을... 문사수 2010.12.10 27106
공양하고 계십니까? 문사수 2010.08.10 27104
괴로움의 정체 문사수 2011.06.04 27104
부처님이시어, 시험에 들게 하여주소서 1 문사수 2012.01.24 27047
‘남이 짓는 공덕을 따라 기뻐한다’는 것은 문사수 2012.10.24 26917